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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16대 흘해왕은 우로(于老)의 아들이 아니라 고손자

윤여동 2012. 11. 9. 18:26

 

윤여동설 - 신라 16대 흘해왕은 우로(于老)의 아들이 아니라 고손자

 

 

                                                9대벌휴왕(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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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                                                         ↓차자

                       골정=옥모부인                                              이매=내례부인의 딸

                         ↓아들                                                         ↓아들

                         ?(실명)                                               10대나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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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          ↓딸             ↓차자                    ↓장자                        ↓차자

11대조분왕          명원      12대첨해왕                 우로=명원부인       나음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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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딸          ↓아들                          ↓                                                     ↓장자                            ↓차자

        ?(실명)    광명           ?(실명)                         ?(실명)                             13대미추왕=광명부인                      말구

        ↓                             ↓                                ↓

14대유례왕                       걸숙                              ?(실명)

                                       ↓                                ↓

                               15대기림왕                            ?(실명)

                                                                         ↓

                                                16대 흘해왕

 

 

 

   삼국사기에 신라 16대 흘해왕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는 우로는,

  10대 나해이사금 14년(A.D.209)조에, “가을 7월 포상8국이 공모하여 가라를 침공하여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리음(利音, 필자주 : 10대 나해왕의 둘째아들로서 14대 유례왕의 외할아버지 나음(奈音)과 동일인으로 보인다)으로 하여금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는데, 8국의 장군들을 쳐서 죽이고 사로잡혀 갔던 6천인을 빼앗아 돌아왔다”라는 기록으로부터 역사에 그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11대 조분왕 15년(A.D.244) 조에, “봄 정월 이찬 우로를 임명하여 서불한을 삼고 지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조분왕 16년(A.D.245)조에,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쳤으나 이기지 못하자 퇴각하여 마두책을 지키는데, 그날 밤이 몹시 추웠다. 우로가 사졸들을 위로하고 몸소 장작불을 피워주니 군사들이 감격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첨해왕 3년(A.D.249)조를 보면, “여름4월에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우로가 왜인들에게 피살당하여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을 보면, “석우로는 나해이사금의 아들이다.[혹은 각간 수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첨해왕 재위 7년(A.D.253) 계유년에 왜국사신 갈나고가 사관에 머물고 있었는데, 우로가 농담으로 말하기를 ‘머지 않은 때에 너의 왕을 소금 굽는 노비로 만들고, 왕비를 부엌종으로 만들겠다’고 하였더니 왜왕이 이 말을 듣고 성을 내어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우리를 치므로 왕이 출궁하여 유촌에 머물렀다.

  우로가 말하기를, ‘오늘의 환란은 제가 말을 삼가지 못한데 기인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하고는 왜군 진영으로 가서 말하기를 ‘전일에 한 말은 농담일 뿐이었는데, 이렇듯 군사를 출동하기에 이를 줄이야?’ 하니 왜인이 대답하지 않고 그를 묶어 섶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이고 돌아갔다.

  이때에 우로의 아들은 어려서 걸음을 걷지 못했으므로 다른 사람이 그를 안아 말에 태워서 돌아왔는데, 이가 후일의 흘해이사금이다.

  미추왕 때에 왜국 대신이 예방하여 왔었는데, 우로의 처(명원부인)가 국왕께 고하여 왜국 사신을 사사로이 대접하겠다고 청하여 그가 많이 취하였을 때 장사를 시켜 뜰로 붙잡아 내려 불태워 죽임으로써 전날의 원수를 갚았다. 왜인들이 분개하여 금성을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가 국가간에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환란을 초래하게 되어 그 책임을 지고 불태워져 죽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16대 흘해이사금 조를 보면,

  “흘해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나해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우로 각간이요, 어머니는 명원부인이니 조분왕의 딸(필자주 : 조분왕의 여동생의 오기로 보인다)이다.

  우로는 임금을 섬겨 공이 있었고, 여러번 서불한이 되었다.

  우로는 흘해의 용모가 특이하고 두뇌가 명민하고 일하는 것이 어느 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여러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내 집을 흥하게 할 자는 필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논의하여 말하기를, ‘흘해가 어리지만 노성한 덕이 있다’ 하고는 곧 받들어 왕으로 세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10대 나해왕 →우로 →16대 흘해왕으로 혈통이 이어진 듯 기록하고 있고, 더구나 확인이라도 하게 하려는듯 아버지인 우로가 아들인 흘해를 보고 “내 집을 흥하게 할 아이”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석우로열전에도 흘해왕이 우로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단순하게 삼국사기 기록 만을 읽으면 누구라도 “흘해가 우로의 아들 임이 확실하구나” 라고 생각하게끔 하지만, 필자는 흘해가 우로 각간의 아들일 수 없고, 고손자쯤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로가 나해왕 14년(A.D.209)에 군사들을 이끌고 포상8국의 침공을 받은 가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출정할 정도였다면 이때 우로는 장성한 상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 우로가 20세쯤의 청년이었다고 치고, 연도를 따져보면, 10대 나해왕은 재위 35년에 죽었으니 나해왕이 죽었을 때 우로는 40세쯤이 된다.

  그리고 11대 조분왕이 재위 18년(이때 우로는 환갑쯤의 나이가 되는데, 우로는 그 후 12대 첨해왕 3년인 249년에 죽었다고 하니 환갑을 조금 넘긴 나이에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도 12대 첨해왕이 재위 15년(이때 우로가 살았다면 75세쯤이 된다), 13대 미추왕이 재위 23년(이때 우로가 살았다면 100세쯤이 된다), 14대 유례이사금이 재위 15년(이때 우로가 살았다면 115세쯤이 된다), 15대 기림이사금이 재위 13년(이때 우로가 살았다면 130세쯤이 된다)에 죽고 난 다음에야 16대 흘해왕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흘해왕은 왕위에 올라 재위 47년에 죽었는데, 이는 흘해왕이 아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기록인데, 그 아버지라고 하는 우로가 환갑 쯤의 나이로 죽은 때는 249년이고, 흘해왕이 왕위에 오른 해는 310년이었다.

  따라서 흘해왕은 우로의 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흘해왕이 왕위에 오를 때, 우로가 살았다면 130세쯤이 되고, 그 아들은 100세쯤, 그 손자는 70세쯤, 그 증손자는 40세쯤, 그 고손자는 10세쯤인 것이다. 흘해왕은 우로의 고손자쯤이 되어, 우로는 흘해왕의 고조할아버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혹시 흘해왕의 조상들이 일찍 일찍 혼인을 하였고 또 일찍 아들을 낳았다면 흘해왕이 우로의 5대손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우로가 생전에 “내 집을 흥하게 할 아이”라고 자랑했다는 인물과 우로가 불태워 죽임을 당할 때 걸음마를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었다는 우로의 아들이었다는 삼국사기 기록 속의 인물 역시 흘해왕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흘해왕의 증조할아버지 또는 흘해왕의 할아버지를 지칭한 것이 된다.

  이제부터는 신라 흘해왕의 아버지가 우로라고 해서는 안 된다.

  삼국사기 기록이 잘못된 것이었음이 이제 밝혀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