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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의 “고국(故國)”과 발해의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는 같은 곳인가?

윤여동 2014. 2. 10. 10:00

 

  윤여동설 - 고구려의 “고국(故國)”과 발해의 “서경압록부(西京鴨府)”는 같은 곳인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읽다보면 “고국(故國)”이라는 지명이 여러 번 언급된다.

  8대 신대왕이 죽자 고국곡(故國谷)에 장사지냈다고 하였고,

  9대 고국천왕의 능은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조성했다고 했으며,

  16대 고국원왕(국강상왕)은 고국지원(故國之原)에 장사지냈고,

  18대 고국양왕의 능은 고국양(故國壤)에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기록 속 “고국(故國)”의 위치를 확실히 밝힌 사람은 없다.

  아직까지 고구려 “고국(故國)”의 위치를 확실하게 밝힐 수 없었던 것은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이 어디인지 몰랐고, 국내성을 엉뚱하게도 압록강 북쪽 집안이라 하며, 환도산성 역시 그 부근이라 하였으며, 평양성을 한반도 북한 평양으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인데,

  찾고 보니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부근을 말하는 것이었고, 국내성은 지금의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 부근을 말하는 것이었으며, 고구려의 환도산(丸都山)은 지금의 북경 북쪽에 위치한 군도산(軍都山)이었고, 환도성(丸都城), 안시성(安市城)은 지금의 북경 북쪽 회유구 발해진(渤海鎭) 부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고구려의 옛 땅(高句麗故地)으로 서경을 삼으니 압록부인데, 신주, 환주, 풍주, 정주 4주를 다스린다(高句麗故地爲西京曰鴨淥府 領神,桓,豊,正四州)”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용원(동경용원부)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길이고, 남해(남경남해부)는 신라길이며, 압록(서경압록부)은 조공길이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위 지도를 세심히 살펴보면 필자가 주장하는 발해 5경의 위치가 매우 합리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요사 동경도 녹주압록군절도 조를 보면,

  “녹주압록군절도는 본래 고구려고국(本高句麗故國)인데, 발해에서는 서경압록부라고 불렀다. 성의 높이는 3장이고 광륜(둘레)은 20리이다. 신주 환주, 풍주, 정주 4개주를 다스린다(渌州鴨渌軍節度 本髙(句)麗故國 渤海號西京鴨渌府 城髙三丈 廣輪二十里 都督 神, 桓, 豐, 正 四州事)”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환주(桓州)는 고구려의 중도성이다. ...............(녹주압록군절도의) 서남쪽 2백리에 있다(桓州 髙麗中都城 故縣三桓都神鄉淇水皆廢 髙麗王於此剏立宫闕 國人謂之新國 五世孫釗 晉康帝建元初 為慕容皝所敗宫室焚蕩 户七百 隸渌州 在西南二百里)” 라고 기록되어 있어 환주(桓州)가 곧 환도(丸都)임을 알게 하는 기록이다.

  그런데 고구려 때의 환도(丸都) 즉 발해, 요나라 때의 환주(桓州)가 지금의 북경 북쪽 발해진(渤海鎭) 부근으로 비정되므로, 기록대로라면 지금의 회유 발해진에서 동북쪽으로 200리를 가면 발해의 서경압록부인 신주(神州)와 요나라의 녹주압록군절도인 신주(神州)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을 말하는 것인데, 주변의 산세가 매우 험하고, 장성이 있으며, 여러 강이 흘러드는 곳이고,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왕의 어머니인 유화태후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한데, 그곳이 고구려의 고국(故國)으로서 발해의 서경압록부, 요나라의 녹주압록군절도가 설치되었던 곳이 틀림없어 보인다.

 

☆ 그곳의 지명이 “신주(神州)”라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신의 고을”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구려 사람들은 그곳이 유화태후의 고향이었음을 알고 고향(故鄕)이라는 의미로 “고국(故國)”이라고 불렀고, 왕들이 죽자 그곳 유서 깊은  고향 땅 고국(故國)의 들판에 왕릉을 조성했던 것은 아닐까?

  다만 고구려가 국내에 도읍하고 있던 때에 8대 신대왕과 9대 고국천왕이 죽자 국내가 아닌 왜 고국곡과 고국천원에 왕의 능을 조성하게 되었는지,  또 고구려가 평양(황성)에 도읍하고 있던 때인 16대 고국원왕과 18대 고국양왕 때 왜 평양이 아닌 고국원과 고국양에 왕릉을 조성했는지 하는 것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고, 또 19대 광개토왕부터는 왜 왕릉조성지에 대한  기록이 사라지게 되었는지도 앞으로 밝혀야 할 숙제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2년(A.D.198) 조를 보면, "환도성을 쌓았다(築丸都城)”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산상왕 13년(A.D.209) 조를 보면, “왕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王移都於丸都)” 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가 국내로부터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 때가 10대 산상왕 때였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그 앞 대 왕들인 8대 신대왕과 9대 고국천왕의 능을 고국곡과 고국천원에 조성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 이미 “고국(故國)”이라는 곳에 왕릉을 조성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의아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왕의 능은 당시의 도읍 부근에 조성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물론 고구려가 국내에 도읍하고 있던 8대 신대왕 때로부터 9대 고국천왕 재위 기간에 환도에 궁실을 지어 별궁으로서 활용하기도 하였었는데, 10대 산상왕이 왕위에 올라 환도별궁을 보호할 수 있는 산성이 없어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198년에 산성을 쌓기 시작하여 209년에 이르러 환도산성이 완공되자 도읍을 국내로부터 그곳 환도로 완전히 옮겼기 때문에 8대 신대왕이나 9대 고국천왕이 생전에 환도의 별궁을 오가다 보니 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국(故國)”이라는 곳에도 가 보게 되었고, 자신이 죽은 후 그곳 고국에 묻히기를 원했다면 후손된 입장에서는 유지를 받들어 원근을 불문하고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능을 조성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