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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원래의 대방군(帶方郡)은 북경 동쪽 준화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 2014. 2. 21. 19:32

 

윤여동설 - 원래의 대방군(帶方郡)은 북경 동쪽 준화부근 - 최초주장

 

 

 

 

 

 

 

 

  전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 낙랑군 조를 보면, 낙랑군 25개 현 중에 둔유현(屯有縣)과 대방현(帶方縣)이 있고,

 

☆전한낙랑군 25개현 : 조선현(朝鮮縣), 남감현(남邯縣), 패수현(浿水縣)), 함자현(含資縣), 점제현(黏蟬縣), 수성현(遂城縣), 증지현(增地縣), 대방현(帶方縣), 사망현(駟望縣), 해명현(海冥縣), 열구현(列口縣), 장잠현(長岑縣), 둔유현(屯有縣), 소명현(昭明縣), 누방현(鏤方縣), 제해현(提奚縣), 혼미현(渾彌縣), 탄열현(呑列縣), 동이현(東暆縣), 불이현(不而縣), 잠태현(蠶台縣), 화려현(華麗縣), 사두매현(邪頭昧縣), 전막현(前莫縣), 부조현(夫租縣)

 

  후한서 지제23 군국5 낙랑군 조에도, 후한낙랑군 18개현 중에 둔유현(屯有縣)과 대방현(帶方縣)이 있다.

 

☆후한낙랑군 18개현 : 조선현(朝鮮縣), 감현(邯縣), 패수현(浿水縣), 함자현(含資縣), 점제현(占蟬縣), 수성현(遂城縣), 증지현(增地縣), 대방현(帶方縣), 사망현(駟望縣), 해명현(海冥縣), 열구현(列口縣), 장잠현(長岑縣), 둔유현(屯有縣), 소명현(昭明縣), 누방현(鏤方縣), 제해현(提奚縣), 혼미현(渾彌縣), 낙도현(樂都縣)

 

  이를 보면 대방(帶方)이라는 지명은 대방군(帶方郡)이 설치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 둔(屯)이란 의미는 군사들의 주둔지라는 의미인데, 지금도 중국에는 ○○둔이라는 지명이 수 없이 많이 있다. 따라서 둔유(屯有)란 둔이 있는 곳 즉 군사들이 주둔해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서 그곳에 군사들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지 위서동이전 한(韓) 전을 보면,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이고, 남쪽은 왜와 경계를 접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 진한,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속하여 철따라 조알하였다. (후한) 환제와 영제 말기에 한(韓)과 예(濊 : 동예)가 강성하여 군현을 통제하지 못하니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

  건안 연간(A.D.196-220)에 공손강이 (후한 낙랑군) 둔유현(屯有縣) 남쪽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공손모, 장창 등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을 모아 군사를 일으켜 한(韓)과 예(濊 : 동예)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점점 돌아오고. 그 후 왜와 한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대방군은 공손강에 의해 후한의 건안연간에 설치되었는데 그 위치는 후한낙랑군 둔유현의 남쪽이고, 대방군의 남쪽에는 한(마한)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부근에 예(濊 : 동예)도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서 백제전(隋書 百濟傳)을 보면, “(백제는) 대방의 옛 땅에서 처음 그 나라를 세웠다(始立其國于帶方故地)”라 하였고,

   북사 백제전(北史 百濟傳)에도, “(백제는) 대방의 옛 땅에서 처음 나라를 세웠다(始立國于帶方故地)”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가 바로 이 대방 부근에서 나라가 건국되었음을 알게 한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 땅에서 건국되었고, 낙랑, 말갈과 국경을 접했으며, 같은 책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조를 보면, 파사이사금이 말하기를, 신라가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위 기록들을 종합하여 대방군(帶方郡)이 과연 지금의 어디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는지 비정해 보자.

  그리하면 마한, 진한, 변한의 위치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낙랑군의 위치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예(동예)의 위치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백제, 신라, 가야의 건국지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말갈의 위치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와 공손씨 일가의 접촉 기록이 많은 사서에 언급된다.

  즉 동명왕(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의 후손 구태라는 사람이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의 딸과 혼인을 했다고 하기도 하고, 9대 책계왕은 대방왕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고 하기도 하며,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구원병을 보내기도 한다.

  공손씨 일가는 지금의 북경 부근을 중심으로 한 때 세력을 떨쳤던 가문이었으므로 이는 백제가 요동군, 대방군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백제의 근초고왕 때는 고구려가 요동 낙랑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지역으로 진출하여 그곳에 백제군을 설치하기도 하고, 동성왕은 북위군과 대규모 전쟁을 하여 승리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북위와 백제가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요서군은 옛 요수인 영정하 서쪽 지금의 방산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한도 북경 부근이어야 하고, 마한의 북쪽에 설치되었다는 대방군도 북경 부근이어야 하며, 마한의 동북쪽에서 건국된 백제 역시 북경 부근에서 건국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는 접촉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고구려, 신라, 예(동예), 동옥저, 낙랑, 말갈 등도 모두 북경 부근의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