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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려와 후백제 최후의 전투지 “일리천(一利川)”의 위치

윤여동 2014. 8. 16. 07:52

윤여동설 - 고려와 후백제 최후의 전투지 “일리천(一利川)”의 위치

 

 

 

  삼국사기 견훤열전을 보면,

  견훤은 옛 백제지역인 무진주에서 봉기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전주, 공주 등을 차지한 후 도읍을 전주에 정하게 되나 후일 장자인 신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금산에 있는 절에 석달 동안이나 갇혔다가 도망쳐 고려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는 “936년 6월에 이르러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고하기를, ‘늙은 이 몸이 전하에게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죽이려는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대왕은 신병으로서 적란을 섬멸하여 주시면 제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하니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와 장군 술희를 보내 보기병 1만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친히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군사를 합하여 일선(一善 )으로 진격하니 신검이 병사로서 대항하였다.

  갑오일(936년 9월 8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진을 벌였다.

  태조가 상보 견훤과 함께 열병을 하고, 대상 권견, 술희, 금산과 장군 용길, 기언 등으로서 보기병 3만을 거느리고 좌익이 되게 하고, 대상 김철, 홍유, 수향과 장군 왕순, 준량 등으로서 보기병 3만을 거느리고 우익이 되게 하고, 대광 순식과 대상 긍준, 왕겸, 왕예, 검필과 장군 정순, 종희 등으로서 강한 기병 2만과 보병 3천과 흑수, 철리, 여러 방면의 강한 기병 9천5백으로서 중군이 되게 하고, 대장군 공훤과 장군 왕함윤으로서 군사 1만5천을 거느리고 선봉을 서게 하여 북을 울리며 진군하여 가니, (후)백제장군 효봉, 덕술, 명길 등이 고려 군사의 기세가 정돈된 것을 바라보고 무기를 버리고 진 앞에 항복하였다.

  태조가 (대)장군 공훤으로 하여금 바로 중군을 치라하고 모든 군사가 함께 나아가 협격하니 (후)백제 군사가 분산되어 달아났다.

  신검은 그의 두 아우와 장군 부달, 소달, 능환 등 40여명을 데리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하여 주었다.............(중략)..............신검은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은 것이 (능환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서 자기 본심이 아니며, 또 그가 나라를 바치고 자기의 죄과를 뉘우쳤다 하여 특별히 그의 죽을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 [혹은 삼형제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견훤은 수심과 고민으로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절에서 죽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고려의 도읍 개경이 어디인지, 천안부가 어디인지, 일선이 어디인지, 일리천이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필자는 고려의 도읍 개경을 한반도의 개성이 아니라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 부근으로 보고 있고, 후백제의 도읍 전주는 지금의 당산으로 보고 있다.

 

☆ 지금 하북성 진황도 노룡은 옛 웅진(熊津)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그런데 위 기록을 보면, 태조 왕건은 군사들을 개경에서 출발시켰고, 천안부(天安府)에 집결한 후 사열을 하고, 일선으로 진군 시켰다고 하였는데, 지금 하북성 “천안(遷安)”이 관성(필자주 : 고려의 도읍 개경으로 비정된다)의 남쪽 난하변에 위치하고 있고, 천안에서 난하를 건너 서남쪽으로 향하면 당산으로 갈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천안(遷安)으로 변해 있지만 천안(天安)과 천안(遷安)은 발음이 같고, 천안(遷安)에서는 고려지(高麗紙)라는 유명한 한지(필자주 : 직지심체요절은 바로 이 천안지로 인쇄했을 것이다)가 생산되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지금의 북경 동남쪽 당산(唐山)은 후백제의 도읍 전주(全州)로 비정되는 곳이므로 이때 고려 태조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과 후백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지금의 천안(遷安)과 당산(唐山) 중간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을 것이고, 그곳에 일리천이라는 강이 흘렀을 것이다.

  결국 이 일리천(一利川)은 지금의 "사하(沙河)"로 비정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전투에서 패한 후백제군이 항복을 했고 후백제는 멸망했다.

 

  또한 이 전투가 끝난 얼마 후 견훤은 등창이 나서 “황산(黃山)의 절”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 속의 황산은 옛날 백제말 계백장군이 신라침공군을 결사적으로 막다가 전사한 곳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이해되는데, 지금도 일리천전투 추정지 부근에 “황산구촌(黃山口村)”이라는 지명이 있으니 혹시 그곳 부근에 있던 절에서 견훤이 죽은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의 청룡산이 견훤이 죽은 옛 황산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사람들 중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고는 경상도 선산도호부가 신라 때의 일선군이라는 기록이 있자 일리천이 한반도의 경북 선산 부근에 있는 하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대규모 군사를 출전시켜 후백제의 도읍이었던 전주를 향하여 갔고, 당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고려군을 막아 도읍인 전주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고, 왕건은 천안에 군사를 집결시킨 후 출발했다.  그렇다면 고려군과 후백제군간의 전투는 천안과 전주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즉 일선이나 일리천이라는 곳은 천안과 전주 사이에 있던 지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나라 군사들이 조우하여 전투를 한 일리천이 엉뚱하게도 경북 선산 부근이라니 이게 어디 말이 되는가?

  위 지도를 보면 그러한 주장이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