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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당 태종이 안시성 동남쪽 모퉁이에 쌓았던 토산(흙산)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16. 1. 10. 19:25

윤여동설 - 당 태종이 안시성 동남쪽 모퉁이에 쌓았던 토산(흙산)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서기 645년 당 태종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의 일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조의 기록을 보면,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안시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토산(흙산)을 쌓고 안시성으로 점점 가까워졌다. 성 안에서도 성을 더욱 높여 방어를 굳게 하고 군사들이 교대하면서 하루에 6,7회씩 싸웠다.

당나라 군사의 돌격차와 기계포의 돌이 성벽을 허물었으나 성안에서 그때마다 목책을 세워서 부서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다쳤는데 당 태종이 몸소 침을 놓아 주었다.

  밤낮을 쉬지않고 토산(흙산)을 쌓아 무릇 60일이 걸렸으며 품이 50만이나 들었다.

  토산(흙산) 꼭대기가 성보다 두어 길이나 더 높아서 성안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었다. 도종이 과의 부복애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흙산) 꼭대기에 진을 쳐서 적군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산이 허물어져서 성을 눌러 안시성이 무너졌다.

  그런데 마침 이때 부복애가 제 마음대로 지키던 곳을 떠나니 우리(고구려) 군사 수백명이 성의 허물어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드디어 토산(흙산)을 탈취하여 웅거하면서 참호를 파고 지켰다.

  당 태종이 화가 나서 부복애의 목을 베어 조리 돌리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치게 했으나 사흘이 지나도 이기지 못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로 나가서 죄를 청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급박했던 전투상황을 그려볼 수 있게 하는 기록인데, 결국 당 태종은 이렇듯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았으나 끝끝내 안시성이 함락되지 않자 철군을 결정하게 된다.

   이때 당 태종은 요동은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을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다. 또한 군량이 머지않아 떨어지게 생겼으니 철군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당 태종은 자그마한 안시성 하나를 함락 시키지 못하고 철군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망신스러웠던지 이를 대범함으로 치장하기 위하여 비록 적장이지만 성을 굳게 지킨 안시성주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한다고 하면서 겹실로 짠 비단 1백필을 선물로 보내고는 군사를 돌려 철군하게 된다.

  중국 사서에는 이 날이 645년 음력 918일 이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60일간 50만명의 품을 들여 당 태종이 안시성 동남쪽 모퉁이에 쌓았다는 토산(흙산)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안시성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옛 요동은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지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북경 부근의 옛  요동은 후일 요나라의 동경요양부, 금나라의 동경요양부가 되었다]

  따라서 안시성은 옛 요동이었던 지금의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지금의 요하 동쪽에서 안시성을 찾고 있었으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고, 당 태종이 쌓았던 토산(흙산)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북경 북쪽 발해진(渤海鎭)은 옛 환도성(丸都城)으로서 한 때는 고구려의 도읍 역할도 하였으나 11대 동천왕 때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공을 받고 함락 당한 적이 있었고, 16대 고국원왕 때에도 전연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또 함락당하여 궁실이 불타고 성벽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두번씩이나 함락 당한 경험이 있어 그 후 취약했던 부분을 보강하여 성벽을 매우 튼튼하게 쌓아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환도성은 안시성(安市城)”으로 이름이 바뀌었던 듯한데, 지금 그곳은 사방이 높고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험준한 능선을 따라 성벽이 쌓아져 있는데 출입구는 오직 동남쪽 한곳 밖에 없다.

  따라서 당 태종도 그 출입구를 통해야만 성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곳 성벽을 넘으려고 토산(흙산)을 쌓기도 하는 둥 별별 짓을 다해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당 태종은 지금의 북경 북쪽 회유(懷柔)에서 회사하(懷沙河)를 따라 올라가다가 이도하(二道河) 부근에 토산(흙산)을 쌓아 안시성을 함락시키려 시도하다가 실패했던 것이다.

  당 태종이 645년에 쌓았던 안시성 동남쪽 모퉁이 토산(흙산)의 흔적을 찾으려면 그곳으로 가야한다.

  [필자주 : 지금 회유의 인제골프장 동쪽 언덕이 옛날 당태종이 쌓았던 토산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위 사진의 중앙이 당 태종이 쌓은 토산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