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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려말 8도와 이성계의 권력기반 동북면(東北面)의 진짜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 2017. 12. 17. 17:34

윤여동설 - 고려말 8도와 이성계의 권력기반 동북면(東北面)의 진짜위치 - 최초주장

 

 

   이성계는 136110월에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고려 공민왕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고, 홍건적의 침입 때는 사병 2천을 이끌고 개경 수복작전에 참여하여 개경에 맨 먼저 입성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고려가 1258년 원나라에게 빼앗겼다가 135699년 만에 탈환한 쌍성총관부를 13622월에 이르러 원나라가 재탈환하기 위하여 여진장수 나하추로 하여금 수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려를 침입하자 공민왕은 동북면 도지휘사로 하여금 그를 막게 했으나 계속 패배하자, 7월에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를 막게 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나하추가 이끄는 침공군을 전멸시켰고 나하추는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친 후 원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명나라에 투항해야만 했다.

  이후에도 이성계는 왜구와 여진 등을 토벌하면서 30여 년 동안 전장을 누비게 되는데 한 번도 패전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그의 벼슬은 나날이 올라가 1362년 동북면 병마사가 된 이후 밀직부사, 동북면도지휘사, 동북면도원수문화찬성사로 점점 승진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1368년에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인 서기 1388년에 이르자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이 원래 원나라의 땅이었으므로 요동에 예속시키겠다고 통고해오고 철령위를 설치하자 우왕은 4월 초하루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정벌을 명하게 된다.

  그러자 이성계가 아뢰기를,

  “지금 군사를 일으키는 데에는 4가지 불가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고, 둘째는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며, 셋째는 온 나라가 멀리 정벌을 하면 빈틈을 타서 외적이 침입할 것이며, 넷째는 무덥고 비가 오는 시기라 활에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하고 요동 정벌에 반대하였으나 최영의 요동정벌 주장에 밀려 결국 요동정벌군을 편성한다.

  그리하여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는데 좌· 우군의 총수가 38,830명이었고 심부름꾼이 11,600명으로서 약 5만 명이었다. 그리하여 418일 조민수와 이성계는 군사들을 이끌고 서경(현 하북성 승덕시)을 출발했는데 군사는 10만이라 발표했다.

  최영과 우왕은 전투를 독려하기 위하여 그 다음 날 개경(현 하북성 관성만족자치현)으로부터 서경(현 하북성 승덕시)으로 옮겨 머무른다.

  한편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요동정벌군은 57일에 압록강의 위화도(威化島)에 진을 쳤는데 도망하는 군사가 길을 이었다.

  이성계나 조민수의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513일에 이르자 좌 · 우군 도통사인 조민수와 이성계는 이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회군을 요청했으나 우왕과 최영은 그를 무시하고 진군을 독촉했다.

  522일에 이르러 좌· 우군 도통사가 다시 최영에게 사람을 보내 회군할 것을 청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위화도 태조봉 추정지]

 

  그리하여 이성계와 조민수는 명을 어기고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을 되돌아 건넜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위화도회군이라 한다.

  그런데 이때 군사들이 모두 위화도에서 빠져나오자 장마비에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 위화도가 물에 잠겨 버렸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자 우왕과 최영은 서경(현 하북성 승덕시)에서 개경(현 하북성 관성현)으로 급히 되돌아가는데, 이성계 휘하의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요청했으나 이성계는빨리 가면 반드시 전투를 해야 하니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된다.”하고는 사냥도 하면서 일부러 천천히 뒤쫓아 갔다고 한다.

  그리고 군사들에게는 왕을 죽여서는 안 되고, 백성들의 오이 한 개라도 손을 대는 자는 엄히 다스리겠다는 엄명을 내린 후 천천히 행군하여 6월 초하루에 이성계가 개경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성내의 우왕에게 글을 올려 최영을 제거하라 요구하였으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는 63일에 이르러 황룡을 그린 큰 깃발을 앞세우고 선죽교를 지나 진군하여 최영군을 격파하고, 최영을 잡아 고봉으로 귀양 보낸다.

  그러자 우왕은 66일에 손수 갑옷을 입고 환관 80여명과 이성계, 조민수의 집을 급습했으나 집 앞에 군사들을 주둔시키고 그들이 집에 있지 않아 죽이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와 조민수는 다음 날인 67일 궁중 안에 비치되어 있던 병장기와 말안장을 모두 회수하고 68일 우왕을 강화로 추방한다.

  그리고는 국보(옥새)를 공민왕의 정비 안씨에게 가져다주고 다음 날인 69일 차기 왕을 지명토록 했다.

  이때 조민수는 우왕의 아들인 아홉 살짜리 창을 추대하고, 이성계는 다음 왕을 왕씨의 종친 중에서 골라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어 의견이 갈리게 된다.

  결국 이색의 지원을 받은 우왕의 아들 창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고,

  조민수는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 서해도, 교주도 도통사로 임명되고,

  이성계는 동북면도, 삭방도, 강릉도 도통사로 임명되어 이때 이성계는 고려를 남북으로 양분한 북쪽의 병권을 손에 쥐게 되어, 고려 땅의 절반이 이성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고려의 동북면은 옛 옥저 지역이었고, 한사군 때의 초기 현토군이었으며, 발해의 남경남해부였으며, 원나라 때의 쌍성총관부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나서 이성계는 조준 등과 함께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신진관료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리하여 조준은 토지제도를 개혁하자는 상소를 올리는데 조민수는 이에 반대하다가 조준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고 만다. 그러자 고려 전체는 이성계의 손아귀 속에 들어가게 되고 조정은 이성계를 지지하는 신진 세력으로 채워졌고 조준, 정도전, 정몽주 등은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켜 강화로 보내고, 정창군 왕요를 새 왕(공양왕)으로 옹립한 후 우왕과 창왕을 사사하게 하고, 다시 공양왕을 폐위시켜 사사함으로써 고려는 34474년의 역사를 뒤로한 채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이루어 새로운 나라 조선(이씨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