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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금현성(錦峴城)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 2018. 7. 7. 10:27

윤여동설 - 백제 금현성(錦峴城)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1(A.D.550) 조를 보면,

  “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함락시키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錦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이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군사를 출병시켜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하고 군사 1천명을 머물게 하여 그곳을 지켰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錦峴城)을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이 중 특히 금현성(錦峴城)이라는 곳은 백제 초기 온조왕 때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그를 보면,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26(A.D.8) 가을7월 왕이 말하기를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임금과 신하가 각각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니 그 나라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이를 병합하여 버리게 된다면 순망치한이 될 터인 즉 그때에는 후회를 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이를 빼앗아 후환을 없애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겨울10월 왕이 군사를 출동시키면서 거짓으로 사냥을 하러 간다고 말하고는 조용히 마한(馬韓)을 습격하여 그 국토를 병합하였는데, 다만 원산성(圓山城)금현성(錦峴城) 두 성만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27(A.D.9) 여름4월 원산성과 금현성 두 성이 항복하매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침내 마한이 멸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원산성과 금현성이 원래는 마한의 성이었으나 마한이 멸망한 후 백제로 편입된 성이었음을 알 수 있고, 백제가 개국초기부터 소유하고 있던 금현성을 그로부터 500여년 후인 서기 550년 진흥왕 11년에 이르러 신라에게 그 성을 빼앗겼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인하여 나제동맹도 깨어지게 되고, 554년에 이르러서는 백제 성왕이 관산성(管山城) 전투 때 신라군에게 잡혀 죽게 되어 이 후 두 나라는 철천지원수의 나라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 금현성(錦峴城)은 지금의 어디쯤에 위치했던 성이었을까?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가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펼쳐 두 나라 군사들이 피로한 틈을 타서 신라가 그 두성을 모두 빼앗아버렸다는 것으로 보아 이 성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접경지대에 위치했을 것인데, 곧 지금의 청룡하 최상류 지역으로서 평천과 능원 사이 지역에 해당된다.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한반도의 충북 진천 부근이 금현성이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는 소가 웃을 일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지와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으로서, 삼국은 그곳에서 전쟁을 했지 한반도에서 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능원 부근은 옛 진번국, 맥국(貊國)의 땅으로서 소머리 형상의 산이 있어 신라에서는 이곳을 우수주(牛首州) 또는 우두주(牛頭州)로 불렀.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27(A.D.222) 조에, “10월 백제군사가 우두주(牛頭州)에 들어와 이벌찬 충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다가 웅곡에서 적에게 패하여 단신으로 돌아오니 그를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으로 삼아 군사사무를 겸하여 보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우두주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에 위치했던 성이었음을 알 수 있고,

  또 기림이사금 3(A.D.300) 조에, “3월 왕이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에 제사를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태백산(太白山)이 이 우두주에 위치한 산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신라에서는 이곳 우두주의 태백산을 매우 성스러운 장소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왕검조선의 첫 도읍은 아사달(阿斯達)이었다. 그런데 아사달은 우수하벌판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고조선의 첫도읍 아사달은 우두주(우수주)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했을 것이다.

 

  또한 우두주에 관해서는 진덕여왕 원년(A.D.647) 조에 “2월 대아찬 수승을 임명하여 우두주 군주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태종무열왕 2(A.D.655) 조에도 겨울 10월 우수주(牛首州)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에서 우두주와 우수주를 함께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고,

  삼국통일 이후인 효소왕 7(A.D.698) 조에도 봄 정월 이찬 체원으로 우두주 총관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성덕왕 35(A.D.736) 조에도 이찬 윤충, 사인 영술을 보내 평양주와 우두주 2주의 지세를 살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