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금관가야 4

윤여동설 - 한반도 김해는 금관가야의 도읍 금관성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김해는 금관가야의 도읍 금관성이 아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8년(A.D.87) 조를 보면, "가을8월 왕이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내가 덕이 없이 나라를 가져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를 접하였는데도, 덕망은 백성들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위엄은 외국이 경외하게 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성새와 보루를 수리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의 서쪽 국경은 백제와 접하였고, 남쪽국경은 가야와 접하고 있었음을 알게 하고,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즉위 2년(B.C.43) 계묘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도읍을 정하려 한다” 하고는 곧 임시궁궐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으로 나아가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다가 좌우 사람들을 보고..

카테고리 없음 2017.03.17

윤여동설 - 가야왕후 허황옥이 황룡국 여자였다고라?

윤여동설 - 가야왕후 허황옥이 황룡국(黃龍國) 여자였다고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27년(A.D.8) 조를 보면,   “봄 정월 왕의 태자 해명이 옛 도읍(졸본)에 남아 있었는데, 힘이 세고 용감했다.  황룡국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궁(필자주 : 활을 말하는 것인데 맥궁일 것이다)을 선물했더니 해명이 사신이 보는 앞에서 그 활을 잡아당겨 꺾으면서 ”힘을 쓰지 않았는데도 활이 약해 부러졌다" 고 하여 황룡국왕이 그 말을 전해 듣고 매우 무안해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28년 조에는 그 후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때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때였는데, 해명태자는 도읍이전을 반대하며 국내로 가지 않고 졸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자 유리왕은 황룡국왕에..

카테고리 없음 2010.06.05

윤여동설 - 금관가야의 건국시조 수로왕의 혈통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금관가야(金官伽倻)의 건국시조 수로왕의 혈통 - 최초주장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A.D.42) 3월에 아홉 간인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이 물가에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구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있었다. 가서 본 즉 자색 새끼줄로 금합을 매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금합을 열고 보니 해처럼 둥근 여섯 개의 금빛 알이 있었으므로 아도의 집에 가져다 두었다. 이튿날 아홉 사람이 다시 모여서 열어보니 알 여섯 개는 껍질이 쪼개져 여섯 동자가 되어 있었다. 나이는 열다섯 살쯤 되었고, 용모가 매우 거룩하여 모두 절하며 축하하였다. 동자는 나날이 자라 10여일을 지나니 키가 9척이나 되었다. 무리들이 드디..

카테고리 없음 2010.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