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난주사비설 5

윤여동설 - 백제의 웅천(熊川)과 웅진(熊津)의 지명 유래와 곰의 형상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의 웅천(熊川)과 웅진(熊津)의 지명 유래와 곰의 형상 - 최초공개 [옛 웅진성으로 비정되는 진황도 노룡고성 서문] [하북성 진황도 노룡현 부근의 지형 확대 : 한 마리의 곰 형상으로 보이시나요?] 백제의 웅천(熊川)은 지금의 하북성 청룡하(靑龍河), 웅진(熊津)은 진황도 노룡(盧龍) 백제 온조왕이 나라를 세우고 비류백제의 땅을 통합한 후 마한과 경계를 정할 때의 초기 강역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되어 전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B.C.6)조를 보면,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리고, 나라의 영역을 획정하니, 북(필자주 : 서쪽의 오기이다)으로는 패하(浿河 : 패수)에 이르렀고(北至浿河), 남쪽(필자주 : 동쪽의 오기이다)으로는 웅천(熊川)으로 한..

카테고리 없음 2020.02.08

윤여동설 - 후삼국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후삼국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고대의 요동군(요 동경요양부, 금 동경요양부)은 지금의 북경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금성)은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였고,   고려의 도읍 개경(송악)은 지금의 하북성 관성(寬城)만족자치현이었으며,   후백제의 도읍 전주(완산)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唐山)이었다. ☆ 전주이씨(완산이씨)들의 원래 고향(본관)은 한반도의 전북 전주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이었다.    고조선은 한반도에 없었고,  삼한인 마한, 진한, 변한도 한반도에 없었으며,   삼국사기 기록 속 고구려, 백제(대륙백제), 신라, 가야 역시 한반도에 없었다.  따라서 후삼국인 고려, 후백제, 후기신라는 한반도에 위치하지 않았고,   발해북쪽 지금의..

카테고리 없음 2016.11.23

윤여동설 -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 주류성(周留城)과 임존성(任存城)의 위치 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 주류성(周留城)과 임존성(任存城)의 위치 찾기 - 최초공개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성이었던 주류성과 임존성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던 성일까?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조를 보면, “무왕의 조카 복신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때에 중 도침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며 반하였다. 옛 왕의 아들로서 왜국에 볼모로 갔던 부여풍을 맞아들여 왕으로 삼으니 서북부에서 모두 호응하매 군사를 이끌고 사비 도성에 있는 유인원을 포위하였다.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유인궤로서 검교대방주자사를 삼아 왕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군사를 적당하게 발동시켜 유인원을 구원하게 하니........(중략).........인궤가 군사를 엄숙하게 통제하여 싸우면서 전진하여 오므로 ..

카테고리 없음 2014.10.04

윤여동설 - 북한산(北漢山), 대야성(大耶城)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북한산(北漢山), 대야성(大耶城)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6년(A.D.555) 조를 보면,   “겨울10월 왕이 북한산(北漢山)을 순행하고 국경을 넓혀서 정하였다.  11월에 왕이 북한산으로부터 돌아와 교서를 내려 지나온 주와 군에 1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지방 죄수들로서 중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면하여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 학자들은 이때 진흥왕이 북한산을 순수하고 순수비를 세웠을 것이라고 하는데, 어느 사서에도 이때 순수비를 세웠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지금 한반도 서울 북한산의 옛 비석을 진흥왕북한산순수비라고도 하는데,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때 진흥왕이 순수했던 진짜 북한산은 발해 북쪽 진황도에 있는 지금의 "도산..

카테고리 없음 2014.09.05

윤여동설 - 훈요십조 제8조는 한반도의 전라도를 말하는게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훈요십조 제8조의 "차현이남 (車峴以南 ) 공주강외(公州江外)"는 한반도의 전라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고려의 건국시조 왕건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던지 서기 943년 4월에 대광인 박술희를 불러 자기가 이루어 놓은 고려를 후손들이 그르칠까봐 걱정되니 자신의 후예들이 아침 저녁으로 펴보고 귀감으로 삼게 하라 하면서 자신이 직접 지은 "훈요 십조"를 주고, 5월에 이르러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훈요십조 중 제 8조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그 논란의 중심에 "차현과 공주강"이 자리하고 있다.      훈요십조 제 8조의 전체적 내용은,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의 산 모양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의 주군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 ..

카테고리 없음 2007.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