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북한성 5

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에는 북성과 남성이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에는 북성과 남성이 있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A.D.371) 조를 보면,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침공하여 왔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패하(패수)가에 군사를 숨겨 놓고 기다리다가 그들이 도착하자 갑자기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한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힘을 다하여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으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移都漢山)”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중국 사서인 송서와 남사 그리고 양직공도 백제국사에는 백제가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고 그곳에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때 옮긴 도읍이 바로 한성(漢城)이었..

카테고리 없음 2017.05.27

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은 한곳이 아니라 남한성과 북한성이 있었다

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은 한곳이 아니라 남한성과 북한성이 따로 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한성(漢城)”을 “백제의 5백년 도읍지”라 인식하고 있는데, 그것이 과연 역사적 진실인 것일까? 백제의 온조왕은 기원전 18년에 위례성(하남위례성)에 도읍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다가 기원전 5년에 도읍을 한수의 남쪽(필자주 : 한수의 하류로 옮겼다고 했어야 정확한 표현이었다) 남한성으로 옮기게 된다. ☆ 백제 건국설화를 보면, 온조왕은 미추홀로 가서 나라를 세웠던 형인 비류왕이 죽자 그 신하들과 백성들을 십제에 귀속시키고 미추홀의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고 전하는데, 아마 비류왕과 온조왕은 쌍둥이 형제였던 듯 하다. 이때 온조왕이 도읍을 옮기게 된 이유는 그가 전해인 기원전..

카테고리 없음 2010.10.25

윤여동설 - 백제의 위례성 - 하남위례성 - 남한성 - 한성 - 북한성의 관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위례성 - 하남위례성 - 남한성 - 한성 - 북한성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한다 - 최초주장 [백제 한산 부아악 추정지] 삼국사기 기록 중 백제의 위례성, 하남위례성, 남한성, 한성, 북한성의 관계에 관한 기록들은 매우 혼란스럽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백제의 도읍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사람마다 주장들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弥鄒忽)로 돌아가서 살게 되었고,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서 보좌역을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였는데, 이때는 전한 성제 홍가 3년(B.C.18)이었다”고 기록함으로서 비류가 세운 나라의 도읍은 미추홀이었고, 온조십제의 최초 ..

카테고리 없음 2010.09.06

윤여동설 - 근초고왕이 옮긴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은 진황도 도산남쪽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근초고왕이 옮긴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은 진황도 도산남쪽 - 최초공개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A.D.371) 조를 보면,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침공해 왔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패하가에 군사를 숨겨놓고 기다리다가 그들이 도착하자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힘을 다하여 항전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으니,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왔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移都漢山)"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백제가 도읍을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을 알게 한다. ☆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백제가 신미년(A.D.371)에 도읍을 "한산(漢山)"이 아닌 "북한..

카테고리 없음 2008.09.26

윤여동설 - 백제의 남한성은 하북성 당산 천안시 건창영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의 남한성은 하북성 당산 천안시 건창영부근 - 최초공개     사실 백제 최초의 도읍, 더 엄격히 말한다면 온조십제 최초의 도읍이 위례성(慰禮城)이냐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냐 또는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이 동일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고, 한산에 남한산과 북한산이 따로 존재했느냐, 한성이 두개로서 남한성과 북한성으로 나누어져 있었느냐 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논란거리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서 보좌역을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는데, 이때는 전한 성제 홍가 3년(B.C.18)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기원전 6년 조에는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제 나가서 순행하다가 한수(漢水..

카테고리 없음 2008.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