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후성진 3

윤여동설 - 고구려의 비류수(沸流水)는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의 홍하(紅河)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비류수(沸流水)는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의 홍하(紅河) - 최초공개     [북부여의 도읍 흘승골성으로 비정되는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의 위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추모왕(주몽왕) 조를 보면,   “졸본천[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러 그 지방의 토양이 비옥하고 산하가 험고함을 보고 곧 도읍을 정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틈이 없어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와서 비류수라는 강변에 허름하게 집을 짓고 살았음을 알게 하는데, 지금까지 기록 속 “비류수(沸流水)”가 지금의 어느 강을 말하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 주몽은 북부여 해모수의 고손자였다.   그 아버지 해불리지가..

카테고리 없음 2014.01.19

윤여동설 - 고구려 유리왕이 지은 골천이궁[鶻川離宮]터를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유리왕이 지은 골천이궁[鶻川離宮]터를 찾았다 - 최초주장 [고구려 초기 유리왕이 지은 골천이궁터로서 졸본의 북쪽 공기 맑고 경치좋은 곳에 위치한다. 이러한 인연 때문이었는지 유리왕은 이곳 골천호족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3년(B.C.17) 조를 보면,   “가을 7월 골천(鶻川)에 이궁을 지었다.[秋七月 作離宮於鶻川]”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겨울10월 왕비 송씨가 죽으매 왕이 다시 두 여자를 취하여 계실로 삼았다. 하나는 화희이니 골천(鶻川)사람의 딸이요, 하나는 치희이니 한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질투하여 화목하지 못하므로 왕이 양곡(凉谷)에 동, 서 두 궁을 지어 각각 따로 있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골천(鶻川)이 언급..

카테고리 없음 2014.01.10

윤여동설 - 고구려 시조 추모왕릉(주몽왕릉) 용산(龍山)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시조 추모왕릉(주몽왕릉) 용산(龍山)의 위치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추모왕(주몽왕) 19년(B.C.19) 조를 보면,   "가을 9월 왕이 죽으니 이 때에 나이 40세(필자주 : 사실은 61세였다)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 주몽왕(추모왕)은 기원전 79년에 동부여에서 태어나 22세 때인 기원전 58년에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갔고, 그곳에서 졸본부여왕의 둘째공주와 혼인함으로써 부마가 되었다가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다가 기원전 37년에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꿈으로서 고구려의 건국시조가 되었고, 기원전 19년에 죽었으니 61세에 죽은 것이다.  그런데 주몽왕(추모왕)이 동명왕이 세운 졸본부여의 국호를 버리..

카테고리 없음 2014.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