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관구검 4

윤여동설 -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은 지금의 북경 북쪽 발해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은 지금의 북경 북쪽 발해진(渤海鎭) - 최초주장 요사지리지는 환주(桓州)에 대하여, “환주(桓州)는 고구려 때 도성이었고, 옛날에는 현이 셋이었는데 환도(桓都), 신향(神鄕), 패수(浿水? 필자주 : 환도성 부근에는 패수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다) 3현이었다.[필자주 : 浿水는 淇水의 오기인 듯] 고구려왕(산상왕을 말함)이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자 백성들이 신국(新國)이라고 불렀고, 고국원왕 때에 불탔다” 고 기록하고 있어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에 대한 역사기록과 일치한다. 따라서 요사지리지의 기록대로라면 요나라 때의 환주(桓州)가 곧 고구려의 환도성(丸都城)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환도성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환도성은 고구려 산..

카테고리 없음 2011.09.24

윤여동설 - 위나라 관구검의 환도성 침공로와 동천왕의 파천로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나라 관구검의 환도성 침공로와 동천왕의 파천로 찾기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1대 동천왕 20년(A.D.246) 조를 보면,  “가을8월 위(魏)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玄菟)로 나와서 침입하였다.   왕이 보․기병 2만으로 비류수(沸流水) 상류에서 맞받아 쳐서 적군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고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적군을 쳐부수어 또 3천여 명을 죽이고 붙잡았다. 왕이 모든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위나라의 많은 군사가 도리어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도다. 관구검은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아귀 속에 있도다’하고 곧 철기군 5천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쳤다.   관구검이 ..

카테고리 없음 2010.06.21

윤여동설 - 환도성(丸都城)과 안시성(安市城)은 같은 곳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환도성(丸都城)과 안시성(安市城)은 같은 곳이다 - 최초주장 [학자들이 환도산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집안 부근의 산성자산성 환도산성 표지석과 성벽인데 사실 이곳은 환도성이 아니다] 삼국유사 왕력 고구려 16대 국원왕(고국원왕) 조를 보면, “임인년(A.D.342) 8월 안시성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것이 환도성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흥법 순도조려 조에도, “상고해보면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이곳을 혹은 안정홀(安丁忽 , 필자주 : 安寸忽의 오기인가?)이라고도 하는데 요수 북쪽에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우리를 매우 헷갈리게 한다. 왜냐하면 환도성은 서기 198년 고구려 산상왕 2년 2월에 처음으로 쌓았다고 하고, 서기 209년 산상왕 13년 10월에 국내성(국내위나암)으로부터 옮..

카테고리 없음 2010.05.30

윤여동설 - 고구려의 세번째 도읍 환도성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의 세 번째 도읍 환도성의 위치 - 최초주장 고구려 10대 산상왕은 서기198년에 이르러 환도성을 쌓았다. 이는 이때 후한이 말기 현상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산상왕은 상황에 따라서는 요동 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이 환도성을 활용할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후한의 멸망이 거의 기정 사실화되자 209년 10월에 이르러 환도성으로 옮겨살며 요동 쪽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 우리는 지금 집안 북쪽에 위치한 산성자산성을 환도산성일 것이라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이었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중국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 부근이었다.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연경현 영녕고성] 앞서 8대 신대왕은 172년에 ..

카테고리 없음 2008.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