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노룡두 5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남한이 이었다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남한이 이었다 우리의 옛 역사는 환인시대, 환웅시대를 지나며 홍산문화(요하문명)를 꽃피웠고, 고조선에 이르러 청동기문화를, 다시 한과 위만조선, 부여시대에 이르러 철기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부여는 다시 고구려가 되고, 고구려는 한사군 중 임둔군, 낙랑군, 구현토군(낙랑동부도위)과 요동군, 대방군을 흡수함으로써 대제국이 되었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발해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되고, 발해는 다시 요·금·원·청·중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위만조선은 다시 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한사군이 되었다가 고구려에 복속되고, 한은 다시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누어지게 되고, 마한에서 백제가, 진한에서 신라가, 변한에서 가야가 건국되었다가 통일신라가 되고, 통일신라가 ..

카테고리 없음 2009.05.14

윤여동설 - 신라 김씨왕들은 정말 흉노족 김일제의 후예들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 김씨왕들은 정말 흉노족 김일제의 후예들일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9년(A.D.65) 조를 보면,   "봄3월 밤에 금성 서쪽 시림 숲 속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자 왕이 날이 새자마자 호공을 보내어 둘러보게 하였더니, 호공이 돌아와 나무 가지에 조그마한 금괴가 걸려 있고 하얀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궤를 가져와 열었더니 그 속에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위품이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하고는 거두어 길렀다.   그가 자라니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으므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카테고리 없음 2009.04.23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지는 선화공주가 지은 절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지는 선화공주가 지은 절이 아니다 - 최초주장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善花公主主隱 他密只稼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애인 만들어 놓고, 서동의 방..

카테고리 없음 2009.03.17

윤여동설 - 신라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낙랑은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 30년(B.C.28)부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록을 보면,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침입했는데, 변방 백성들이 밤에 대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가 들에 있는 것을 보고 서로가 말하기를 '이 지방의 백성들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니 가히 도덕이 있는 나라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몰래 군사로서 습격한다는 것은 도둑이나 다름없다. 부끄럽지 않은가? 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라는 이상한 기록인데, 삼국유사 낙랑국 조에는 "국사(國史)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항복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동일한 시기에 대한 신라와 낙랑과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

카테고리 없음 2009.02.15

윤여동설 - 고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까지 진출한 기록의 진실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까지 진출했다는 기록은 역사적 사실일까? - 최초주장    [위 : 요동 표시가 된 곳이 지금의 북경이다.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 일원이었고, 고구려와 백제는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여러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A.D.49) 조를 보면,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후한)의 북평(우북평의 오기),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했더니 요동태수 채동이 은의로서 대하므로 다시 화친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놓고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이 지금의 한반도 압록강 북쪽 집안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때 고구려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 멀리 북경..

카테고리 없음 2007.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