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조하 5

윤여동설 - 고구려 살수대첩(薩水大捷)과 고려 귀주대첩(龜州大捷)의 현장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살수대첩(薩水大捷)과 고려 귀주대첩(龜州大捷)의 현장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 - 최초공개 [위 : 강물이 구불구불 흘러 지형이 거북 머리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그 부근의 지명이 귀주(龜州)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 부근이다] [고북구의 척계광 석상]

카테고리 없음 2018.09.14

윤여동설 - 고려 귀주대첩(龜州大捷)의 현장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려 귀주대첩(龜州大捷)의 현장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 - 최초공개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이후 압록강 하류로부터 동쪽으로 화주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서기 1018년 12월 10일(무술일) 거란의 부마 소손녕이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8천3백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안주)에 주둔시켜 거란의 침공을 방어하게 한다.    그리하여 강감찬은 다시 기병 1만2천명을 뽑아 흥화진(興化鎭)에 매복시키고, 또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 물을 가두어 두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물을 터놓아 거란군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복병을..

카테고리 없음 2011.03.25

윤여동설 - 고구려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 조를 보면,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27년(A.D.44) 조를 보면,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여 그 땅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드니 살수(薩水)이남 지역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 대무신왕이 최리의 낙랑국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낙랑국 땅을 차지하자 7년 뒤에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옛 낙랑국 땅의 일부인 살수이남 땅을 고구려로부터 다시 탈환하여 낙랑군을 부활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

카테고리 없음 2011.03.06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싫든 좋든 우리 고대 역사와 “낙랑(樂浪)”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옛날 고조선 · 위만조선의 도읍이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고, 한사군 때 전한낙랑군의 치소가 왕검성이었으며, 또 고구려의 평양성과 고려의 서경 역시 같은 장소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왕검성 즉 낙랑군의 치소를 정확히 찾는다면 우리 고대 역사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낙랑(樂浪)" 이란 말이 원래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즐거울락(樂)”과 “물결랑(浪)” 자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경치가 좋은 내륙의 큰 강 또는 호수주변이나 큰 바다를 끼고 있는 ..

카테고리 없음 2009.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