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초기현토군 4

윤여동설 - 고려말 8도와 이성계의 권력기반 동북면(東北面)의 진짜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말 8도와 이성계의 권력기반 동북면(東北面)의 진짜위치 - 최초주장 이성계는 1361년 10월에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고려 공민왕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고, 홍건적의 침입 때는 사병 2천을 이끌고 개경 수복작전에 참여하여 개경에 맨 먼저 입성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고려가 1258년 원나라에게 빼앗겼다가 1356년 99년 만에 탈환한 쌍성총관부를 1362년 2월에 이르러 원나라가 재탈환하기 위하여 여진장수 나하추로 하여금 수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려를 침입하자 공민왕은 동북면 도지휘사로 하여금 그를 막게 했으나 계속 패배하자, 7월에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를 막게 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나하추가 이끄는 침공군을 전멸시켰고 나하추는 겨우 목숨을 건져..

카테고리 없음 2017.12.17

윤여동설 - 미인들의 나라 동옥저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미인들의 나라 동옥저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후한서 동옥저(後漢書 東沃沮)전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까지이고, 북쪽은 읍루(挹婁)와 부여(夫餘),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했다.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땅이 사방 천리의 절반쯤 된다.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 밭에 씨를 뿌리면 농사가 잘된다. 읍락에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사람들의 성질은 정직하고, 강건하며, 용감하다. 창을 잘 다루어 보병전을 잘한다.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은 (고)구려와 유사하다. 장사지낼 때에는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장이나 되며, 한쪽 끝 부분을 열어놓아 문을 만든다. 새로 사람이 죽게되..

카테고리 없음 2009.03.20

윤여동설 - 새로 옮긴 현토군의 치소는 북경 서북쪽 하북성 장가구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기원전 75년(元鳳6년)에 새로 옮긴 현토군의 치소는 북경 서북쪽 하북성 장가구 부근 - 최초공개     원봉(元封) 4년(B.C.107)에 설치된 초기 현토군의 위치는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고,   원봉(元鳳) 6년(B.C.75)에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는 현토군 역시 아직도 어디를 말하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한반도 북한 평양을 낙랑군으로 인식한 조선시대 사람들은 초기 현토군이 함경도 함흥지역에 설치되었다가 요하 부근으로 옮겨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렇지만 옛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고, 전한 낙랑군의 치소였던 곳이 한반도 부근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라면 현토군의 위치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

카테고리 없음 2008.12.17

윤여동설 - 초기 현토군과 낙랑동부도위와의 관계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초기 현토군과 낙랑동부도위와의 관계 - 최초공개 후한서 동옥저 전을 보면,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토군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필자 주 : 구려의 오기이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 (후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 도위의 관직을 없애고 후에 모두 그 거수를 봉하여 옥저후로 삼았다. 그 땅이 작아 큰 나라 사이에 끼어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옥저 땅에 초기 현토군의 치소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 후한서 예전에는, "원봉3년(B.C.108)에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임둔·현토·진번으로 나누었는데, 소제 시원 5년(B.C.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카테고리 없음 2008.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