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패수난하설 5

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의 원래 강역과 도읍이전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의 원래 강역과 도읍이전 위치 – 최초공개     우리 상고사(上古史)와 고대사(古代史)의 중심강역은 한반도가 아니다.  지금의 발해 북쪽 대륙이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의 중심지로서,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해발 2,067m)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환인의 환국(桓國)이 그곳에 있었고,   환웅의 단국(檀國)도 그곳에 있었으며,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도 그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환국(환인국)의 도읍은 지금의 요녕성 능원(凌源)으로 비정되고,   단국(환웅국)의 도읍 신시(神市)는 내몽골 적봉(赤峰)부근으로 비정된다. [옛 고조선의 첫도읍 아사달성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내몽골 영성현의 대명진토성, 지금 중국에서는 이곳을 거란(요)의 중경성..

카테고리 없음 2023.02.25

윤여동설 – 살수이남(薩水以南)과 패수이남(浿水以南)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살수이남(薩水以南)과 패수이남(浿水以南)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 조를 보면, “왕이 낙랑(樂浪)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27년(A.D.44)조에는, “가을9월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바다를 건너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살수이남(薩水已南, 薩水以南)이 후한에 속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 대무신왕이 서기 37년에 낙랑군(樂浪郡)을 쳐서 빼앗자, 7년 후인 서기 44년에 이르러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살수이남 땅을 다시 빼앗아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6대 태조대왕 4년(A.D.56) 조를 보면, “가을7월 동옥저(東沃沮)를 쳐서 그 ..

카테고리 없음 2022.06.17

윤여동설 - 궁예의 도읍지 철원(鐵原) 북쪽 풍천원(楓川原)과 피살지 부양(斧壤)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궁예의 도읍지 철원(鐵原) 북쪽 풍천원(楓川原)과 피살지 부양(斧壤)의 위치 - 최초공개       삼국사기 궁예열전을 보면, 궁예는 철원(鐵原)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고, 강역도 상당히 넓었었으나 폭정을 일삼다가 왕건과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반정을 일으키자, 미복으로 갈아입고 산 속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안 되어 부양(斧壤, 필자주 : 부양(斧壤)이란 그곳의 지형이 도끼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생각된다) 백성들에게 잡혀 살해당하였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철원도호부 고적 조를 보면,    “풍천원(楓川原)은 궁예가 도읍했던 곳으로서 철원도호부의 북쪽 27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평강현(平康縣) 건치연..

카테고리 없음 2020.06.22

윤여동설 - 고구려의 도읍이전과 요수, 압록강, 살수, 패수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도읍이전과 요수, 압록강, 살수, 패수의 위치 - 최초공개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이고,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은 북경 서북쪽 적성 후성진이며, 국내성은 북경 북북서쪽 연경 영녕진(영녕고성)이고, 환도성(안시성)은 북경 북쪽 회유의 발해진이며, 평양성은 북경 동북쪽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이다. 요수는 북경 서쪽 영정하이고, 압록강은 북경 동북쪽 백하(밀운수고)이며, 살수는 북경 동북쪽 고북구를 통과하는 조하이고, 패수는 평양성의 서쪽과 남쪽을 지나는 난하이다. ☆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조를 보면, “고구려가 처음에는 중국 북쪽 땅에서 살았으나 점점 패수 옆으로 옮겼다(高句麗始居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側)”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가 졸본에서 ..

카테고리 없음 2019.07.12

윤여동설 - 신라 3백리 장성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라 3백리 장성의 진짜위치 - 최초공개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각 장성(長城)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한반도에서 장성의 흔적은 어느 한곳도 발견되지 않고 있고, 후대인 고려시대에도 천리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역시 한반도에서는 장성의 흔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왜 한반도에서는 역사서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장성의 흔적들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삼국사기 신라본기 41대 헌덕왕 18년(A.D.826) 조를 보면, "가을7월 우잠태수 백영을 시켜 한산(漢山) 북쪽의 여러 주와 군 사람들 1만을 징발하여 패강(浿江 : 패수)에 장성 3백리를 쌓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패강(패수)은 한반도의 대동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북경 동쪽을 흐르는 지금의 난하를 ..

카테고리 없음 2017.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