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燕京 5

윤여동설 - 위만의 고조선으로의 망명로와 왕검성 공격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의 고조선으로의 망명로와 왕검성 공격로 - 최초주장 삼국지 한(韓) 전을 보면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해오는 과정과 왕검성을 탈취하는 과정을 위략의 기록을 인용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를 보면, “위략에 이르기를,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고,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을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하여 주왕실을 보존시켜 주려고 하였으나 그의 대부 예(禮)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고는 예를 파견하여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朝鮮 : 고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해지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쪽지방을 침공하여..

카테고리 없음 2015.08.09

윤여동설 - 천문미기분야 “연(燕)”나라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천문미기분야 “연(燕)”나라의 위치 - 최초주장 天文二十八宿 “연경(燕京)”은 연(燕)나라의 도읍(京)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연나라는 모든 역사서에 “천문미기분야(天文尾箕分野)”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천문도 28수(二十八宿) 중 “미(尾)” “기(箕)” 방향에 해당한다는 말로서 동북방향을 이르는 말이다. 연나라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야 하는 것은 연나라가 우리 고대 강역의 서쪽에 바로 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연나라의 위치를 정확히 찾으면 우리 역사 강역의 서쪽 경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연나라는 주 무왕이 소공(召公) 석(奭)을 연 땅에 봉하면서 시작되어, 전국시대 때는 전국칠웅으로 성장하기도 하였으나, 진시황이 연나라를 쳐서 없애고, 5군 즉 요동군, 요서군, 상곡군, 우북평..

카테고리 없음 2014.06.22

윤여동설 - 요(거란) 5경의 위치 찾기

윤여동설 - 요(거란) 5경의 위치 찾기 요(거란) 5경의 위치에 대한 기록 상경임황부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는 원래 한(漢)나라의 요동군(遼東郡) 서안평(西安平) 땅(?)이다. [필자주 : 상경임황부가 요동군에 속한 현이었다는 것은 오기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나라 왕망은 북안평(北安平)이라 불렀다. .....................(중략)....................... 요 태조 신책 3년(A.D.918)에 그곳에 성을 쌓고 황도(皇都)라고 불렀다. 천현 13년(A.D.938)에 이름을 상경(上京)으로 바꾸었고 부를 임황(臨潢)이라 하였다. 중경대정부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는 우순 때 영주(營州)가 되었고(?), 하나라 때는 기주(..

카테고리 없음 2012.06.25

윤여동설 - 춘추전국시대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은 어디를 말하는가?

윤여동설 - 춘추전국시대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은 어디를 말하는가? 전국책 권제29 연1을 보면, 소진이 연나라의 문후에게 말한 기록이 있어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한다. 기록을 보면, "蘇秦將爲從 北說燕文候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呼 易水 地方二千餘里 帶甲數十萬 車七百乘 騎六千疋 粟支十年 南有碣石 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由田作 棗栗之實 足食於民矣 此所謂天府也 (소진이 장래 합종을 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서 연나라 문후에게 말하기를,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요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누번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운중구원이 있고, 남쪽으로는 호타역수가 있어 땅이 사방 2천여 리입니다. 갑옷 입은 병사가 10만이요, 전차는 7백대이며, 말은 6천 필이고, 10년 간 ..

카테고리 없음 2011.07.01

윤여동설 - 고려 사신들의 연경(燕京) 사행로를 밝힌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 사신들의 연경(燕京) 사행로를 밝힌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백제 조를 보면, 『통전에 이르기를 “주몽이 한나라 건소2년에 북부여[필자주 : 동부여의 오기이다]로부터 동남방[필자주 : 서남쪽의 오기이다]으로 가서 보술수를 건너 흘승골성에 이르러 자리잡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고로써 성씨를 삼았다” 고 하였으며, ☆ 삼국사기 찬자들이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는 통전의 기록이란 통전 권186 변방2 동이하 고구려 조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에는 “朱蒙棄夫餘 東南走渡普述水 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주몽이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달아나 보술수를 건너 흘승골성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고로서 성씨를 삼았다” ..

카테고리 없음 2010.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