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낙랑 6

윤여동설 - 소서노와 비류 온조의 남하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소서노와 비류 온조의 남하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유리를 말함)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드디어 오간, 마려 등 열명의 신하들을 데리고 남쪽지방으로 떠나니 백성들 중에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이리하여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서 살만한 곳을 살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기이 제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조에는, “고전기(古典記)에 이르기를, ”동명왕의 세째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유년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년에 도읍을 한산(漢山:지금의 광..

카테고리 없음 2011.06.24

윤여동설 - 고구려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 조를 보면,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27년(A.D.44) 조를 보면,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여 그 땅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드니 살수(薩水)이남 지역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 대무신왕이 최리의 낙랑국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낙랑국 땅을 차지하자 7년 뒤에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옛 낙랑국 땅의 일부인 살수이남 땅을 고구려로부터 다시 탈환하여 낙랑군을 부활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

카테고리 없음 2011.03.06

윤여동설 - 신라의 호공 발해를 헤엄쳐 건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의 호공 발해를 헤엄쳐 건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38년(B.C.20) 조를 보면,"봄 2월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더니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기를, '진한, 변한은 우리의 속국으로서 근년에 이르러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니 대국을 섬기는 예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하였다. 호공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두 성인(필자주 :혁거세거서간과 알영부인을 말하는 것이다)이 처음으로 임금이 되면서부터 사회가 안정되고, 시절은 좋아서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서로 존경하고 겸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백성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고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건마는 우리 임금이 겸허하여 저를 보내 귀국을 예방하는 것은 지나친 예..

카테고리 없음 2009.05.18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싫든 좋든 우리 고대 역사와 “낙랑(樂浪)”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옛날 고조선 · 위만조선의 도읍이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고, 한사군 때 전한낙랑군의 치소가 왕검성이었으며, 또 고구려의 평양성과 고려의 서경 역시 같은 장소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왕검성 즉 낙랑군의 치소를 정확히 찾는다면 우리 고대 역사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낙랑(樂浪)" 이란 말이 원래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즐거울락(樂)”과 “물결랑(浪)” 자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경치가 좋은 내륙의 큰 강 또는 호수주변이나 큰 바다를 끼고 있는 ..

카테고리 없음 2009.04.03

윤여동설 - 백제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된 나라이다.  그런데 백제(百濟)와 낙랑(樂浪)은 백제가 건국된 시점부터 국경을 직접 접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재위 4년(B.C.15) 조를 보면,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재위 8년(B.C.11)조에는, 온조왕이 낙랑과의 접경지역에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우자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 낙랑을 침공하려 하는 것이냐고 항의하면서 의심하지 않게 하려면 성과 목책을 헐어버릴 것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온조왕이 그 요구를 거부하자 그 일로 인하여 백제와 낙랑사이에 화친이 깨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화친이 깨어진 재위 11년(B...

카테고리 없음 2009.02.13

윤여동설 -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금성)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가 확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금성)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가 확실 - 최초주장 삼국유사 기이 제1 진한 조에는, "신라 전성기에는 서울(서라벌)에 178,936호, 1,360방, 55개 리(里), 35개의 금입택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호당 평균 5명의 식구가 있었다고 가정할 때 당시 신라의 도읍 서라벌의 인구가 894,680명(178,936호X5명)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어느 사람은 지금도 경주시내와 주변 면소재지까지를 포함한 경주시에 30만(275,659명 : 2008년 6월 30일 기준)이 안 되는 인구가 살고 있는데, 어떻게 1천여 년 전에 지금 경상북도 경주에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고, 어느 사..

카테고리 없음 2008.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