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용화산 4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이 어릴 적 살았던 마룡지를 찾았다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이 어릴 적 살았던 마룡지(馬龍池)를 찾았다 백제 30대 무왕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무왕의 이름은 장이니 법왕의 아들이다. 풍채가 영특하고 체격이 컸으며 그 의지와 기상이 호걸스러웠다. 법왕이 왕위에 오른 다음해에 죽어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유사 기이 제2 무왕 조에는,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서쪽의 오기?)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어릴 때의 이름은 서동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항상 마를 캐다 팔아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 무왕의 신분에 대해서는 두 기록이 각각 다른데 필자는 무왕이..

카테고리 없음 2010.09.19

윤여동설 - 고조선의 준왕이 한(韓)을 세운 진짜 "금마(金馬)"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조선의 준왕이 한을 세운 진짜 “금마(金馬)”를 찾았다 - 최초공개 삼국지 한 전에 인용된 위략(魏略)의 기록을 보면,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고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거꾸로 공격하여 주 왕실을 보존해 주려 하였는데, 그 대부 예가 간하므로 중지하고, 대부 예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사기 흉노전에는 1천여리라고 했다)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 ; 滿潘汗이라고도 한다)을 경계로 삼아 마침내 조선의..

카테고리 없음 2009.12.27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지는 선화공주가 지은 절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지는 선화공주가 지은 절이 아니다 - 최초주장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善花公主主隱 他密只稼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애인 만들어 놓고, 서동의 방..

카테고리 없음 2009.03.17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은 왕흥사를 어디에 세웠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은 왕흥사를 어디에 세웠을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법왕 2년(A.D.600) 정월 조를 보면,  "創王興寺 度僧三十人(왕흥사를 창립하고 승려 3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무왕 35년(A.D.634) 조를 보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봄 2월 왕흥사가 낙성되었다. 그 절이 물가에 위치했고 채색과 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했다. 왕이 자주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왕흥사를 준공하는데 무려 34년이나 걸렸음을 알게 하는데, 지금까지 기록으로만 전할 뿐 한반도에서 그 왕흥사의 실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왕 때 백제의 도읍은 사비였으므로 우리는 한반도 충남 부여를 ..

카테고리 없음 2007.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