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대륙백제와 반도백제 11

윤여동설 – 수양제의 고구려 2차 침공로와 퇴각로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수양제의 고구려 2차 침공로와 퇴각로 – 최초공개  [수 양제 초상] (612년 6월) “옛날 명장들이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군사에 관한 일이 한사람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인데, 지금 우리는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양제는 중문(우중문)이 계교와 전략이 있다하여 모든 부대들로 하여금 (우중문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기 때문에 우중문이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우문술 등이 마지못하여 우중문(于仲文)의 말을 좇아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강(필자주 : 압록강이다)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 하였다. 을지문덕이 우문술(宇文述)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하려고 싸우고는 달아나고, 또 싸우고는 달..

카테고리 없음 2023.12.09

윤여동설 – 반도백제의 추정 강역과 초기 왕위계승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반도백제의 추정 강역과 초기 왕위계승 – 최초주장 반도백제의 초기 왕위계승 건국시조 무광왕(武廣王) : 생몰연대 미상 : 325년경 출생(추정) 무광왕의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아버지 계왕이 재위 3년인 346년에 죽었고, 바로 근초고왕과 왕위다툼을 벌였음을 감안하면 당시 20세쯤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따라서 생년은 325년쯤으로 추정해 볼 수 있고, 대륙백제에서 근초고왕과의 20여년에 걸친 왕위다툼에서 최종적으로 패하고 대륙을 떠나 한반도의 지모밀(枳慕蜜) 땅으로 와서 그곳에 도읍하고 국호를 백제(반도백제)라 하고, 왕위에 오른 365년경에는 40세쯤 되었을 것이다. “百濟 武廣王 遷都 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 十三年 歲次 己亥 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백제 무광왕이 지모..

카테고리 없음 2023.09.23

윤여동설 – 고대의 왜국(倭國)은 지금의 요동반도, 임나(任那)는 발해 북쪽 하북성 진황도 일원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대의 왜국(倭國)은 지금의 요동반도, 임나(任那)는 발해 북쪽 하북성 진황도 일원 – 최초공개 중국 사서들에는 고대 왜국(倭國)의 위치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한서(前漢書) : 낙랑해 가운데 후한서(後漢書) : 한(韓)의 동남 대해 가운데 삼국지(三國志) : 대방(帶方) 동남 대해 가운데 진서(晉書) : 대방 동남 대해 가운데 송서(宋書) : 고구려 동남쪽 대해 가운데 남제서(南齊書) : 고구려 동남쪽 대해 가운데 수서(隋書) : 백제, 신라의 동남쪽 북사(北史) : 백제, 신라의 동남쪽 구당서(舊唐書) : 신라 동남쪽 대해 가운데 통전(通典) : 대방 동남쪽 대해 가운데 이상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의 일본이 한반도(韓半島) 동남쪽 열도에 위치하고 있고, 우리 역사학..

카테고리 없음 2022.09.22

윤여동설 – 중국 산동성(山東省)은 백제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빼앗은 전쟁배상지였고, 남제서 백제국전의 삭제된 부분은 바로 이 배상지에 관한 기록일 가능성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중국 산동성(山東省)은 백제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빼앗은 전쟁배상지였고, 남제서 백제국전의 삭제된 부분은 바로 이 배상지에 관한 기록일 가능성 – 최초주장 [위 : 남제서 고구려전의 건무3년(A.D.496) 이후 삭제된 기사] [위 : 남제서 백제국전의 앞부문 삭제된 기사] 남제서 동이전 백제국(南齊書 東夷傳 百濟國) “(남제서 백제국전 삭제부분) .......................................................................... 공에 보답하고 열심히 노력한 것을 위로하여 그 이름을 길이 빛나게 하고자 합니다. 가행영삭장군 신 저근(姐瑾) 등 네 사람은 충성스럽게도 온 힘을 기울여 국난을 없앴으니 그 뜻의 굳셈과 과감함이 명장의 등급..

카테고리 없음 2022.04.29

윤여동설 – 백제 구마나리(久麻那利)는 발해 북쪽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 노룡(盧龍)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구마나리(久麻那利)는 발해 북쪽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 노룡(盧龍) - 최초주장      일본서기 웅략천황 20년 조를 보면,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백제기(百濟記)의 기록을 인용하여 “개로왕 을묘년(A.D.475) 겨울 맥(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 : 百濟漢城)을 친지 7일 7야에 왕성이 함락되어 드디어 위례(尉禮 : 慰禮城)를 잃었다.[필자주 : 당시의 백제 도읍이었던 한성과 위례성이 같은 성이거나 근접해 있던 성일 가능성이 있는 기록이다] 국왕 및 대후(왕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라고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상황과 당시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이 함락될 때 백제 개로왕과 왕후, 왕자 등 일족이 모두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

카테고리 없음 2020.11.07

윤여동설 - 백제 22첨로(檐魯)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22첨로(檐魯)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양서 백제전을 보면,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檐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치성을 고마라 부르고, 읍을 첨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첨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남사 백제전에는, "號所都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土有二十二檐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도성을 고마(固麻)라 부르고, 읍을 첨로(檐魯)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 땅에는 22첨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양직공도 백제국사조에도, "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필자주 :..

카테고리 없음 2020.08.01

윤여동설 - 백제 한산부아악(漢山負兒嶽)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 한산부아악(漢山負兒嶽)의 위치 공개 - 최초공개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이리하여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서 살만한 곳을 살피다가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 하니 열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대한수(북쪽으로 한수가 띠를 두르고)하고, 동거고악(동쪽은 높은 산이 있으며) 하며, 남망옥택(남쪽으로는 평야가 바라보이고)하고, 서조대해(서쪽은 대해로 막혀 있으니)하니 그 천험의 지리가 얻기 어려운 지세이오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으나 비류가 그를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弥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필자주 : 한수 남쪽의 위례성이라는 의미)에 도읍을 정하고..

카테고리 없음 2014.09.28

윤여동설 - 백제 무광왕, 모도왕, 곤지왕자, 동성왕, 무령왕의 관계를 명쾌하게 밝힌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무광왕, 모도왕, 곤지왕자, 동성왕, 무령왕의 관계를 명쾌하게 밝힌다 - 최초주장 [반도백제 무광왕과 왕비의 능으로 추정되는 익산 쌍릉의 위치] [대륙백제] 13대 근초고왕 12대 계왕 ↓ ↓ [반도백제] 14대 근구수왕 시조 무광왕 ..............................I.................... ↓ ↓ ↓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실명) ↓ ↓ 17대 아신왕 ?(실명) ↓ ↓ 18대 전지왕 ?(실명) I............................................ ↓ ↓ ↓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모도왕 ...............I................... ↓ ↓ ↓ 21대 개로왕(근개루왕) 22대 문주왕 곤지 ...

카테고리 없음 2013.08.17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탑출토 사리봉안기의 비밀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탑출토 사리봉안기의 비밀 - 최초공개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이 절을 지었다. 그런데 정관 13년(A.D.639) 기해년 겨울 11월에 벼락이 떨어져 제석정사에 불이 났다" 라는 관세음응험기 기록 속의 무광왕(武廣王)에 대하여, 우리는 정관 13년인 서기 639년이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 무왕 재위기간이라 하여 백제 무광왕이 바로 백제 30대 무왕(武王)과 동일 인물일 것이라 생각한다. ☆ 지금 학자들은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절을 지은 시기와 절에 벼락이 떨어져 불탄 시기를 동일시기로 보고 있으나 절을 지은 시기와 불탄 시기를 왜 동일시기로 보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절을 지은 지 수백년 후에 절에 벼락이 떨어져 불탔다면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절..

카테고리 없음 2009.01.21

역사추리 - 비류백제의 태자는 어디로 갔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비류백제의 태자는 어디로 갔을까? - 최초주장 [무너진 백제장성] 우리는 지금 백제의 건국시조를 "온조왕(溫祚王)"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원래 "백제(百濟)라는 나라의 건국시조는 '비류(沸流)'라고 기록하고 있고, 온조왕은 '십제(十濟)'의 건국시조였는데, 후일 형인 비류왕이 죽자 온조왕이 비류백제와 온조십제를 통합한 후 국호를 새롭게 "백제(百濟)"라고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온조왕은 자신이 세운 나라인 십제의 국호를 버리고 형이 세운 나라인 백제를 국호로 삼았다는 말이 되므로 엄격한 의미에서는 백제의 건국시조는 비류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고, 온조왕은 백제의 2대왕으로 기록해야 마땅할 것이나 삼국사기는 비류백제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는 있지만 단순한 일화정도로 취..

카테고리 없음 2008.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