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미추홀 10

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에는 북성과 남성이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에는 북성과 남성이 있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A.D.371) 조를 보면,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침공하여 왔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패하(패수)가에 군사를 숨겨 놓고 기다리다가 그들이 도착하자 갑자기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한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힘을 다하여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으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移都漢山)”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중국 사서인 송서와 남사 그리고 양직공도 백제국사에는 백제가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고 그곳에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때 옮긴 도읍이 바로 한성(漢城)이었..

카테고리 없음 2017.05.27

윤여동설 - 백제 한산부아악(漢山負兒嶽)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 한산부아악(漢山負兒嶽)의 위치 공개 - 최초공개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이리하여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서 살만한 곳을 살피다가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 하니 열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대한수(북쪽으로 한수가 띠를 두르고)하고, 동거고악(동쪽은 높은 산이 있으며) 하며, 남망옥택(남쪽으로는 평야가 바라보이고)하고, 서조대해(서쪽은 대해로 막혀 있으니)하니 그 천험의 지리가 얻기 어려운 지세이오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으나 비류가 그를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弥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필자주 : 한수 남쪽의 위례성이라는 의미)에 도읍을 정하고..

카테고리 없음 2014.09.28

윤여동설 - 소서노와 비류 온조의 남하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소서노와 비류 온조의 남하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유리를 말함)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드디어 오간, 마려 등 열명의 신하들을 데리고 남쪽지방으로 떠나니 백성들 중에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이리하여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서 살만한 곳을 살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기이 제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조에는, “고전기(古典記)에 이르기를, ”동명왕의 세째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유년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년에 도읍을 한산(漢山:지금의 광..

카테고리 없음 2011.06.24

윤여동설 - 비류백제의 도읍 미추홀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비류백제의 도읍 미추홀(弥鄒忽)을 찾았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이리하여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서 살 만한 곳을 살피다가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자고 하니 열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를 띠었고, 동쪽에는 높은 산맥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이 바라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렇듯 천험의 지리적 잇점을 갖춘 곳은 얻기 어려운 지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비류가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서 보좌를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니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B.C..

카테고리 없음 2010.05.03

윤여동설 - 온조왕 탄생설화와 백제 건국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온조왕 탄생설화와 백제건국 - 최초주장    백제의 건국시조 비류왕과 온조왕의 혈통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록에 나타난 탄생설화를 정리해 보면,   주몽과 졸본부여 공주 사이 탄생설,   주몽과 월군여인 사이 탄생설,   우태와 소서노 사이 탄생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사람은 비류는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고, 온조는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 출생한 이부동모(아버지는 다르고 어머니는 같다는 의미) 사이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근거 없는 주장이다.    주몽과 졸본부여 공주 사이 탄생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부..

카테고리 없음 2009.04.15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과 미추홀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과 미추홀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기원전 42년 기묘년에 소서노는 어린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졸본의 압록강 나루에서 배에 몸을 실었다. 이때 소서노의 나이 25세였고, 비류는 4-5세정도, 온조는 2-3세 정도였다.[필자주 : 혹은 비류와 온조가 쌍둥이 형제였을 가능성도 있다] 원래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호족 연타발의 딸로서 졸본부여 왕족인 우태에게 시집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둘째 아들 온조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인 우태가 갑자기 죽어 젊은 나이에 아들 둘 딸린 과부가 되어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졸본에서 주몽왕과 재혼한 후 자신이 우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졸본부여의 태자로 봉하려 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졸본을 떠나 압록강을 타고 내..

카테고리 없음 2008.09.19

역사추리 - 비류백제의 태자는 어디로 갔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비류백제의 태자는 어디로 갔을까? - 최초주장 [무너진 백제장성] 우리는 지금 백제의 건국시조를 "온조왕(溫祚王)"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원래 "백제(百濟)라는 나라의 건국시조는 '비류(沸流)'라고 기록하고 있고, 온조왕은 '십제(十濟)'의 건국시조였는데, 후일 형인 비류왕이 죽자 온조왕이 비류백제와 온조십제를 통합한 후 국호를 새롭게 "백제(百濟)"라고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온조왕은 자신이 세운 나라인 십제의 국호를 버리고 형이 세운 나라인 백제를 국호로 삼았다는 말이 되므로 엄격한 의미에서는 백제의 건국시조는 비류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고, 온조왕은 백제의 2대왕으로 기록해야 마땅할 것이나 삼국사기는 비류백제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는 있지만 단순한 일화정도로 취..

카테고리 없음 2008.05.28

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백제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백제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온조백제는 기원전 18년 건국하여 위례성에 도읍했고, 기원전 5년 남한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서기 371년에 한성으로 다시 옮겼고, 475년에 웅진으로 옮기고, 538년에 도읍을 사비로 또 옮겼는데, 결국 이곳 사비에서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의자왕이 서기 660년 7월 18일에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도읍명 왕대 도읍이전년도 도읍기간 비고 위례성 온조왕 B.C.18 13년 건국지 남한성 온조왕 B.C.5 376년 비류백제통합후 한성 근초고왕 A.D.371 104년 요서진출후 웅진 문주왕 A.D.475 63년 한성함락당한후 사비 성왕 A.D.538 - 660 122년 국세회복을 위해 그런데 후한서 한(韓)전을 보..

카테고리 없음 2008.03.23

윤여동설 - 온조백제의 건국지는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온조백제의 건국지는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우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온조백제)의 건국설화를 한반도에 비정하여,   비류와 온조가 졸본(환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압록강을 건너고, 패수(대동강)와 대수(예성강 또는 임진강)를 건너, 한산 부아악(서울 북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비류는 서쪽의 미추홀(인천)로 갔고 온조는 위례성(서울)에 도읍하였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서울 부근에서 위례성의 확실한 흔적을 찾지 못했고, 인천에서 비류가 도읍 했던 미추홀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으며, 백제가 500여 년 간 도읍 했을 것이라는 지금의 서울지역에서 확실한 백제의 왕릉을 한 곳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 석촌동 적석총을 백제 왕릉으로 보는 견해..

카테고리 없음 2007.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