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사비 8

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에는 북성과 남성이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에는 북성과 남성이 있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A.D.371) 조를 보면,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침공하여 왔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패하(패수)가에 군사를 숨겨 놓고 기다리다가 그들이 도착하자 갑자기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한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힘을 다하여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으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移都漢山)”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중국 사서인 송서와 남사 그리고 양직공도 백제국사에는 백제가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고 그곳에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때 옮긴 도읍이 바로 한성(漢城)이었..

카테고리 없음 2017.05.27

윤여동설 - 남천정(南川停)과 금돌성(今突城)의 위치찾기

윤여동설 - 남천정(南川停)과 금돌성(今突城)의 위치찾기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A.D.660) 조를 보면,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로가 나타나는데, 이때 신라군의 진격로 중 남천정(南川停)과 금돌성(今突城)이 있다. 기록을 보면, 『여름 5월 26일에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금성)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에 머물렀다. 소정방은 내주(萊州 : 지금의 산동반도)로부터 떠나는데 전선이 천리를 잇달아 물길을 따라 동쪽(필자주 : 서북쪽의 오기이다)으로 왔다. 6월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으로 하여금 병선 1백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게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 백제에 도착하여 (사비의) 남쪽에서 대왕의 군사와..

카테고리 없음 2014.09.12

윤여동설 -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는 발해 북쪽,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난주(난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는 발해 북쪽,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난주(난현) - 최초주장     백제26대 성왕은 서기 538년 봄에 이르러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는 국호까지도 남부여(南扶餘)로 바꾼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는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537년까지로 끝나고, 538년부터는 남부여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인데, "남부여"라는 국호는 "옛 졸본부여의 영광을 남쪽 땅에 재현하겠다"는 명분을 세워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길 때만 잠깐 언급했을 뿐 실제 국호로 사용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백제의 성왕은 왜 이때에 이르러 사비로 도읍을 옮겨야 했던 것일까?   학자들은 그 이유를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 때문에 도읍인 웅진이 위험하다고 보고 더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을 것이라고 추정..

카테고리 없음 2008.10.12

윤여동설 - 백제 문주왕이 옮긴 도읍 웅진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노룡현을 말하는 것이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의 문주왕이 옮긴 도읍 웅진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노룡현을 말하는 것이다 - 최초공개 [백제 웅진성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노룡 영평부성도] [서문] [남문] [진황도 노룡현 영평부성터 내의 시가지(중앙)와 서쪽을 지나는 청룡하] 고구려의 장수왕은 475년(백제 21대 개로왕 21년)에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도읍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도망치는 개로왕을 잡아죽이게 된다. 그리하여 개로왕의 동복동생인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급히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우리는 이 백제의 도읍 웅진을 충남 공주라고 알고 있다. ☆ 삼국사기에는 문주왕을 개로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개로왕의 동복동생이다. 개로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문주왕이 왕위를 이었다. 우..

카테고리 없음 2008.10.06

윤여동설 - 백강구 전투는 발해의 난하하류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강구 전투는 발해의 난하하류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 최초주장 백제는 서기 660년 7월 18일 백제 의자왕이 항복을 하고 9월 3일에 왕과 태자, 왕자 ,장군, 대신 등 98명과 백성 1만 2천명이 당나라 장안으로 끌려가게 되자 좌평 복신이 중심이 되어 주류성을 거점으로 삼고 부흥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당나라에 끌려갔던 의자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0월에 이르러 복신은 왜국으로 사람을 보내 왜국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일본서기에는 부여풍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니 풍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되고, 왜국에서는 군사 5천으로 호위하게 하여 부여풍을 백제로 호송한다. 복신 등은 부여풍이 돌아오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본격적으로 부흥운동을 시작하게 되고, 왜국에서..

카테고리 없음 2008.07.13

윤여동설 - 백제 방어의 요충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방어의 요충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의 기록인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조를 보면, 『당 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대장군 소정방으로 신구도행군대총관을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과 우무위장군 풍사귀와 좌효위장군 방효공 등과 더불어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와서 치게 하고 겸하여 신라왕 김춘추로서 우이도행군총관을 삼아 자기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 현 산동반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나라(신라)의 서쪽 덕물도에 이르니 신라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어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왕(백제 의자왕)이 이 소문을 듣고 여러 신하..

카테고리 없음 2008.04.07

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백제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백제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온조백제는 기원전 18년 건국하여 위례성에 도읍했고, 기원전 5년 남한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서기 371년에 한성으로 다시 옮겼고, 475년에 웅진으로 옮기고, 538년에 도읍을 사비로 또 옮겼는데, 결국 이곳 사비에서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의자왕이 서기 660년 7월 18일에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도읍명 왕대 도읍이전년도 도읍기간 비고 위례성 온조왕 B.C.18 13년 건국지 남한성 온조왕 B.C.5 376년 비류백제통합후 한성 근초고왕 A.D.371 104년 요서진출후 웅진 문주왕 A.D.475 63년 한성함락당한후 사비 성왕 A.D.538 - 660 122년 국세회복을 위해 그런데 후한서 한(韓)전을 보..

카테고리 없음 2008.03.23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은 왕흥사를 어디에 세웠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은 왕흥사를 어디에 세웠을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법왕 2년(A.D.600) 정월 조를 보면,  "創王興寺 度僧三十人(왕흥사를 창립하고 승려 3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무왕 35년(A.D.634) 조를 보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봄 2월 왕흥사가 낙성되었다. 그 절이 물가에 위치했고 채색과 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했다. 왕이 자주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왕흥사를 준공하는데 무려 34년이나 걸렸음을 알게 하는데, 지금까지 기록으로만 전할 뿐 한반도에서 그 왕흥사의 실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왕 때 백제의 도읍은 사비였으므로 우리는 한반도 충남 부여를 ..

카테고리 없음 2007.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