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탁군 8

윤여동설 - 진한(辰韓)과 탁수(涿水)는 무슨 관계였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진한(辰韓)과 탁수(涿水)는 무슨 관계였을까? - 최초주장      삼국유사 기이 제1 진한(辰韓) 조를 보면,  『후한서에 이르기를 “진한(辰韓)의 노인이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韓)으로 오자 마한(馬韓)이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고 하는데, 마치 진나라 말과 비슷하다. 혹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열두 소국이 있는데, 각각 1만호로서 나라를 칭한다.”  또 최치원은 이르기를 “진한은 원래 연나라에서 피난해온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읍과 동네의 명칭을 사탁, 점탁 등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삼국지 한(韓) 전을 보면,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카테고리 없음 2015.01.31

윤여동설 - 원래의 탁록(涿鹿)은 지금의 하북성 탁주(涿州)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원래의 탁록(涿鹿)은 지금의 하북성 탁주(涿州) - 최초공개 탁록벌판(涿鹿之野)은 그 옛날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국운을 걸고 전쟁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매우 유명한 곳이다. 그리하여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위치를 알고 싶어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탁록이 어디인지 위치를 잃어버렸다. ☆ 지금 중국에서는 북경 서북쪽 관청수고 부근에 있는 지금의 탁록현을 바로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다투었던 탁록이라고 하며, 중화삼조당을 세워 관광지로 개발해 놓고 있는데, 그곳은 원래 지명이 보안현(保安縣)으로서 1916년에 이르러 탁록현으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가짜 탁록이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원래의 “탁록(涿鹿)”이라는 곳은 지금의 북경 서남쪽에 위치한 하북성 보정시 “탁주(涿州)” 부근..

카테고리 없음 2014.05.17

윤여동설 - 수 양제 고구려 침공시의 좌12군 우12군 기록의 진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수 양제 고구려 침공시의 좌12군 우12군 기록의 진실 - 최초주장 수 양제 고구려 2차 침공 기록을 보면, 611년 여름 4월 “(수) 양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에 이르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涿郡)으로 모여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수 양제의 군사출발지가 탁군이었음을 알게 하고, 612년 봄 정월 임오일(초2일)에 수 양제가 내린 조서를 보면, “고구려의 하잘 것 없는 것들이 미욱하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와 갈석사이(勃碣之間 =渤碣之間))에 모여들어 요와 예의 지경(遼獩之境=遼濊之境)을 자주 침범하여 왔다”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 수비병들을 죽였으며, 말갈의 습속을 본받아 요서(遼西)를 침략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탁군, 발해와 갈석, 요, 거란, 요서 등의 지명이 언..

카테고리 없음 2014.03.30

윤여동설 -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로와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로와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로 - 최초주장 수 양제와 당 태종은 직접 고구려를 침공했던 사람들이다. 군사들의 출발지가 탁군(涿郡)과 정주(定州)로 달랐을 뿐 고구려 요동성(遼東城)을 향하여 진군했던 것도 같고, 진군 도중에 갈석산(碣石山)에 올랐던 것도 같으며, 결국 고구려 침공에 실패했던 것도 같다. 삼국사기 고구려 영양왕 22년(A.D.611)조를 보면, “봄2월에 수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4월에 양제의 행차가 탁군(涿郡 : 지금의 탁주시 부근)의 임삭궁(臨朔宮)에 이르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여들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A.D.645) 조를 보면, “봄 정월에 당 태종이 정주(定州)를 떠나서..

카테고리 없음 2012.06.18

윤여동설 - 고구려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 조를 보면,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27년(A.D.44) 조를 보면,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여 그 땅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드니 살수(薩水)이남 지역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 대무신왕이 최리의 낙랑국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낙랑국 땅을 차지하자 7년 뒤에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옛 낙랑국 땅의 일부인 살수이남 땅을 고구려로부터 다시 탈환하여 낙랑군을 부활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

카테고리 없음 2011.03.06

윤여동설 - 수 양제가 만든 운하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의 위치

윤여동설 - 수 양제가 만든 운하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의 위치 지금 중국에서는 수 양제 때 만들었다는 운하 통제거와 영제거가 지금의 북경에서 항주까지 장장 1,764km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중국의 주장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

카테고리 없음 2011.02.21

윤여동설 - 수 양제 고구려 침공 때의 좌12군, 우12군의 행군로는?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수 양제 고구려 침공 때의 좌12군, 우12군의 행군로는? - 최초공개 수 양제는 611년 2월 조서를 내려 고구려 침공을 공식화 하고, 군사를 탁군(涿郡)으로 모이도록 발표한 후, 자신도 도읍인 장안을 떠나 4월에 탁군의 임삭궁에 도착한다. 그리고는 전쟁 준비를 완벽하게 한 후 612년 정월에 이르러 군사들을 탁군에서 출발 시키게 되는데, 총 군사의 수효는 1,133,800명으로서 출발에만 40일이 소요되었고, 늘어선 군사들의 깃발이 960리에 이르렀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수 양제 고구려 2차 침공이다. 이때 수 양제는 고구려 침공에 총 24군(여기에서의 한 개 군이 정확히 몇 명으로 구성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을 동원하였는데, 좌12군, 우12군으로 나누..

카테고리 없음 2010.04.11

윤여동설 - 당 태종이 고생하며 건넌 "요택(요동늪)"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당 태종이 고생하며 건넌 “요택(요동늪)”을 찾았다 - 최초공개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와 철군할 때 고생 하며 건넜다고 전해지는 요택(요동늪)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요택이 지금의 요하 하류의 저습지를 말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엉터리 중의 엉터리 주장이다. 왜냐하면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요하를 말하는게 아니라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이었고, 북경 부근이 옛 요동군이었기 때문이다. 서기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기록을 보면, 이때 당 태종은 정주(定州)에서 출발하여 요동을 향하여 가다가 (필자주 : 이때 갈석산에도 올랐다고 한다) 요택(요동늪)을 통과하고,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성에 도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을..

카테고리 없음 2010.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