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호태왕 9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이 시조 추모왕(주몽왕)의 17세손이라는 호태왕비문의 기록은 정확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이 시조 추모왕(주몽왕)의 17세손이라는 호태왕비문의 기록은 정확했다 - 최초주장      "광개토태왕이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의 17세손이 맞다"고 하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록에 따라 주몽으로부터 족보를 따져보면 호태왕은 주몽의 12세손에 불과한데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필자도 이전에는 호태왕 비문의 17세손이라는 기록에 대하여 북부여 시조 해모수로부터 계산하여 광개토대왕이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17세손이라 기록한 것으로 이해했었으나, 호태왕비문을 자세히 보면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터를 잡고 창업했도다)” 라고 하면서 비문을 시작했다.  따라서 문맥으로 볼 때 호태왕(광개토태왕)이 그 17세손이라면 이는 시조..

카테고리 없음 2012.10.07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이 요동군을 완전히 차지한 시기는?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이 요동군을 완전히 차지한 시기는? - 최초주장 지금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광개토태왕이 요동군을 후연으로부터 완전히 빼앗아 차지한 시기를 놓고 영락5년(A.D.395) 이전이다 이후다 하면서 논쟁들을 하고 있는데, 기록들을 꼼꼼하게 검토해 보면 그 정확한 시기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2년(A.D.385) 조를 보면, "여름6월에 왕이 군사 4만명을 출동시켜 요동을 습격하였다. 앞서 연나라왕 수(모용수)가 대방왕 좌로 하여금 용성을 진무하게 하였는데, 좌는 우리 군사가 요동을 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 학경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이들을 쳐부수고 드디어 요동과 현토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겨울11월 ..

카테고리 없음 2012.01.20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정복지 비려 염수와 개선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정복지 비려 염수와 개선로 - 최초주장 호태왕 비문 영락 5년(A.D.395) 을미년 조를 보면, “영락 5년 을미년에 왕이 비려(碑麗)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3개 부(部) 6, 7백영(營)을 격파하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소, 말, 양떼를 노획하고 개선하였다. 양평(襄平) 길을 지나 동쪽으로 ○○성, 역성(力城), 북풍(北豐)을 거쳐 왕이 사냥을 준비시켜 국경도 구경하고 사냥도 즐기면서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여러 지명이 언급되고 있다. 비려(碑麗), 부산(富山), 부산(負山), 염수(鹽水), 양평(襄平), 역성(力城), 북풍(北豐) 등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카테고리 없음 2012.01.13

윤여동설 -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직계혈통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직계혈통도 - 최초주장 시조 추모왕(성은 해씨 이름은 주몽, 고구려 건국시조) ↓ ↓ 아들 2대 유리왕(성은 해씨 이름은 유류) 딸 추모왕의 공주 ↓[구려 고여달[高閭達)과 혼인] 고여율(高如栗) 외손자 ↓ 고막래(高莫來) 외증손자 ↓ 손자 3대 대무신왕 고추가 고재사(高再思) 외고손자 4대 민중왕 증손자 5대 모본왕 (유리왕은 막내아들 여진이 비류수에 빠져 죽은 후 이복여동생의 증손자이고, 죽은 막내아들 여진 또래인 고재사를 양자로 삼았던 듯하다. 그리하여 삼국사기 태조대왕 조에 재사가 태조대왕 궁의 아버지이고, 유리왕의 아들이라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재사의 원래 성씨는 고씨, 왕위에 오르지 않았는데, 그의 장자인 태조대왕 궁이 고구려 6대 왕위에 오름으로써 이때 ..

카테고리 없음 2011.08.02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일생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일생    [374년 왕탄생] 광개토태왕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담덕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4년인 서기 374년 갑술년에 고추가 이련(어지지라고도 한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영웅스러웠고 자라면서 활달한 의지를 가졌었다.  [384년 왕11세] 17대 소수림왕이 384년 11월에 죽고 아들이 없자 그 동생인 고추가 이련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가 곧 고구려 18대 고국양왕으로서 후일의 영락태왕(광개토태왕) 담덕의 아버지이다.    [386년 왕13세] 그리하여 고국양왕의 장자였던 담덕은 고국양왕 3년인 386년 정월에 이르러 13세의 나이에 태자로 봉해졌고, 이해 8월에 고국양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남쪽의 백제를 정벌했는데, 이때..

카테고리 없음 2011.06.01

윤여동설 - 호태왕비의 원래 위치는 하북성 승덕시 부근인가?

윤여동설 - 호태왕비의 원래 위치는 하북성 승덕시 부근인가? 고구려의 도읍 졸본, 국내성, 환도성은 지금의 북경 부근이고, 평양성(平壤城), 황성, 장안성은 한반도의 북한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을 고구려의 국내성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그곳의 태왕릉이라는 고총 역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능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19대 왕으로서 16대 고국원왕의 손자였다. 고구려의 도읍 이전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되어 2대 유리왕 22년(A.D.3)에 국내(국내위나암, 국내성)로 도읍을 옮겼다가 10대 산상왕 13년(A.D.209)에 다시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데 ..

카테고리 없음 2011.02.06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호태왕) 비문 속 비려와 염수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호태왕) 비문 속 “비려(碑麗)”와 “염수(鹽水)”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주장 호태왕 비문 영락 5년(A.D.395) 조를 보면, “영락 5년은 을미년이다. 왕이 비려(碑麗)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세 개 부락 6, 7백영(營)을 격파하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소, 말, 양떼를 노획하고 개선했다. 양평도를 지나 동쪽으로 ◯성 역성 북풍(北豐)을 거쳐왔다. 왕이 사냥을 준비시켜 국경도 구경하고 사냥도 즐기면서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비려(碑麗)”와 “염수(鹽水)”의 위치를 정확히 밝힌 사람은 없었다. 학자들은 비려가 거란의 한 일파였다고 알..

카테고리 없음 2010.05.09

윤여동설 - 고구려왕들의 작위 속에 나타나는 고구려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왕들의 작위 속에 나타나는 고구려의 위치 - 최초주장   19대 광개토대왕(재위 392-413)  평주목, 요동왕, 대방왕 ※ 양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왕이 평주목이 되었고, 요동과 대방 두 나라의 왕으로 봉해졌다. 고안(필자주 : 시기적으로 광개토대왕을 말하는 것인데,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담덕이라 했다)은 처음으로 장사, 사마, 참군의 관직을 설치했고, 후에는 요동군을 차지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북사에도 "동진 효무제 태원 10년(A.D.385)에 (고)구려가 요동군과 현토군을 공격하니 후연의 모용수가 그 아우 모용농을 보내 (고)구려를 쳐서 두 군을 되찾았다. 모용수의 아들 모용보는 (고)구려왕 안을 평주목으로 삼아 요동과 대방 두 나라의 왕으로 책봉했다...

카테고리 없음 2008.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