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호태왕비 8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이 시조 추모왕(주몽왕)의 17세손이라는 호태왕비문의 기록은 정확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이 시조 추모왕(주몽왕)의 17세손이라는 호태왕비문의 기록은 정확했다 - 최초주장      "광개토태왕이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의 17세손이 맞다"고 하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록에 따라 주몽으로부터 족보를 따져보면 호태왕은 주몽의 12세손에 불과한데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필자도 이전에는 호태왕 비문의 17세손이라는 기록에 대하여 북부여 시조 해모수로부터 계산하여 광개토대왕이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17세손이라 기록한 것으로 이해했었으나, 호태왕비문을 자세히 보면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터를 잡고 창업했도다)” 라고 하면서 비문을 시작했다.  따라서 문맥으로 볼 때 호태왕(광개토태왕)이 그 17세손이라면 이는 시조..

카테고리 없음 2012.10.07

윤여동설 - 호태왕비의 원래 위치는 하북성 승덕시 부근인가?

윤여동설 - 호태왕비의 원래 위치는 하북성 승덕시 부근인가? 고구려의 도읍 졸본, 국내성, 환도성은 지금의 북경 부근이고, 평양성(平壤城), 황성, 장안성은 한반도의 북한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을 고구려의 국내성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그곳의 태왕릉이라는 고총 역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능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19대 왕으로서 16대 고국원왕의 손자였다. 고구려의 도읍 이전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되어 2대 유리왕 22년(A.D.3)에 국내(국내위나암, 국내성)로 도읍을 옮겼다가 10대 산상왕 13년(A.D.209)에 다시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데 ..

카테고리 없음 2011.02.06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호태왕) 비문 속 비려와 염수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호태왕) 비문 속 “비려(碑麗)”와 “염수(鹽水)”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주장 호태왕 비문 영락 5년(A.D.395) 조를 보면, “영락 5년은 을미년이다. 왕이 비려(碑麗)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세 개 부락 6, 7백영(營)을 격파하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소, 말, 양떼를 노획하고 개선했다. 양평도를 지나 동쪽으로 ◯성 역성 북풍(北豐)을 거쳐왔다. 왕이 사냥을 준비시켜 국경도 구경하고 사냥도 즐기면서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비려(碑麗)”와 “염수(鹽水)”의 위치를 정확히 밝힌 사람은 없었다. 학자들은 비려가 거란의 한 일파였다고 알..

카테고리 없음 2010.05.09

윤여동설 - 고구려 황성(黃城)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황성의 위치 - 최초공개     고국원왕은 서기 342년 8월 평양성으로부터 환도성으로 옮겨 살았는데, 그 해 11월 연나라 모용황의 침공을 받고 환도성을 함락 당하고, 어머니인 태후 주씨와 왕비가 포로로 잡혀가고 선왕의 유골을 탈취 당하게 되자 그 다음 해인 343년 7월에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옮겨 살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황성(黃城)의 위치에 대하여 "지금의 서경 목멱산 가운데에 있었다" 라고 주를 달아 놓았는데, 고려 때의 서경이란 평양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이때 고국원왕이 환도성을 함락 당하고 평양성이 아닌 평양의 동쪽 목멱산에 위치한 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고국원왕은 334년 8월에 평양성을 증축해 놓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환..

카테고리 없음 2008.08.01

윤여동설 - 고구려가 백제(大陸百濟)를 백잔(百殘)이라 부른 이유는?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는 왜 백제(大陸百濟)를 백잔(百殘)이라 불렀을까? - 최초주장 광개토대왕 비문 영락 6년 병신년 조를 보면,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倦)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OO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이라고 새겨져 있다. ☆ 위 기사 중 괄호 속의 글자는 원래 倦(게으를 권)자였으나 지금까지 이 글자가 글자 모양이 비슷한 倭(왜)자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신묘년 기사의 해석을 놓고 한·일 간에 논란이 많았는데, 사실 이 조문은 왜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압록강 너머 집안에 있는 호태왕 비는 413년 10월에 광개토대왕이 죽자 아들인 장수왕이 그 다음해인 414년 갑인년 9월 29일에 아버지인 광개토대왕 평생의 훈적을 새겨 능 앞에 세운 훈적비로서 당시 고구..

카테고리 없음 2008.02.20

윤여동설 - 장군총은 고구려 장수왕릉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집안의 장군총은 고구려 장수왕릉 아니다 - 최초주장    지금 중국에서는 압록강 너머 길림성 집안에 거의 모든 고구려왕들의 능이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상황을 전혀 모르는 엉터리 주장이다.  고구려는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평양성, 황성, 장안성)를 중심으로 그 부근을 차지하고, 서남쪽으로 최소한 북경을 지나 태행산맥 부근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서기 342년 8월에 평양성에서 환도성으로 이거했는데,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를 말하는 것이고,  환도성은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때 고국원왕이 환도성으로 이거했던 것은 중국이 통일왕조인 서진이 사라지고 5호16국으로 쪼개져 혼란스러워지자 고구려가 요동 쪽으로 진..

카테고리 없음 2008.01.18

윤여동설 - 호태왕 비문 신묘년 기사속의 "왜(倭)"자는 게으를 "권(倦)"자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광개토대왕 비문 신묘년 기사 속 "왜(倭)"자의 원래 글자는 게으를 "권(倦)"자였다 - 최초주장 호태왕 비문에서 해석을 놓고 특히 한·일간에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은 영락6년(A.D.396) 병신년 조에 기록되어 있는 신묘년(A.D.391) 기사이다. 원문을 보면,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이6년병신왕궁솔수군토벌잔국) 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사 중의 "왜(倭)" 자가 정말 "왜" 자다 아니다 또는 일본 사람들이 글자를 변조했다, 그렇지 않다 등으로 나뉘어 주장들이 첨예하고, 조문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어디를 중심으로 하고, 어디를 끊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들이 팽팽하다. 이는 비문이 한문..

카테고리 없음 2007.10.19

윤여동설 -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최대 어디까지 정복했을까?

윤여동설 -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최대 어디까지 정복했을까?                                                                                        압록강 북쪽인 길림성 집안(輯安)에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호태왕비 또는 광개토왕비라고도 부른다)가 발견되어 광개토태왕이 평생에 과연 어디까지 정복했는가 하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의 영향력이 과연 어디까지 뻗쳤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면 지금 조그마한 한반도에 갇혀 왜소해진 우리 국민들의 대륙기질을 잠 깨울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최대의 강역을 이룬 광개토태왕이 당시 어디까지 정복했을까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가능성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한민족의 ..

카테고리 없음 2007.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