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유성 9

윤여동설 - 조조의 노룡새(盧龍塞)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조조의 노룡새(盧龍塞)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발해 해수면 20m 상승시 발해연안 지형변화도] 조조가 요서 오환을 정벌할 때 지났다는 곳이 그 유명한 “노룡새(盧龍塞)”라는 곳인데, 아직까지 아무도 그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다. ☆ 많은 사람들이 노룡새의 위치를 아직까지 찾지 못한 것은 지금의 요하 서쪽을 요서군으로 인식하고, 난하부근을 우북평군으로 인식하고는 그 부근에서 노룡새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옛 요수는 지금의 영정하로서 원래의 요서군은 지금의 북경 서남쪽 방산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207년 2월에 이르러 조조는 업성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향하여 5월에 우북평군의 무종(無終)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홍수로 요서로 가는 도로가 불통이었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 ..

카테고리 없음 2015.02.08

윤여동설 - 임유관(臨渝關)의 원래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임유관(臨渝關)의 원래위치 찾기 - 최초주장 수서 고구려전을 보면, 원(고구려 26대 영양왕)이 말갈의 기병 1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를 침공하였으나 영주(營州)총관 위충이 격파하여 쫓아버렸다. 수나라 고조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량(諒)을 원수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고구려 영양왕)의 작위(상개부 의동 삼사 요동군공 고구려왕)를 삭탈하였다. 이때 군량수송이 중단되어 6군의 식량이 떨어지고 또 군사들이 “임유관(臨渝關)”을 지났는데 전염병이 돌아 왕사의 군사가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요수에 도착하자 원(고구려 영양왕)도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문을 올렸는데, “요동 분토의 신 원 운운” 하였다. 고조는 이에 군사를..

카테고리 없음 2014.04.06

윤여동설 - 전국시대 연나라의 태자 단(丹)과 형가(荊軻)가 살았던 곳은 지금의 어디일까?

윤여동설 - 전국시대 연나라의 태자 단(丹)과 형가(荊軻)가 살았던 곳은 지금의 어디일까? [전국책 권제29 연1을 보면, "소진이 장차 합종을 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유세를 떠나 연 문후에게 말하기를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으로 임호, 누번이 있으며, 서쪽으로 운중, 구원이 있고, 남쪽으로 호타, 역수가 있으며, 땅이 사방 2천리입니다.................남쪽으로 갈석,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으로 대추, 밤의 이익이 있어 만약 무슨 일이 있어 농사를 짓지 못한다 하여도 대추와 밤을 먹는다면 백성들의 먹거리가 족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전국시대 연나라의 위치를 비정해 볼 수 있습니다.] 형가(荊軻)는 전국시대 연나라 태자 단(丹)과 공모한 후 진왕을..

카테고리 없음 2013.05.10

윤여동설 - 북연의 풍홍이 고구려로 망명하여 머물렀던 평곽과 북풍은 과연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북연의 풍홍이 고구려로 망명하여 머물렀던 평곽과 북풍은 과연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15년(A.D.427) 조를 보면,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 장수왕이 황성으로부터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음을 알 수 있고, 장수왕 23년(A.D.435) 조를 보면, “위(북위)나라 사람들이 연나라를 빈번히 공격하니 연(북연)나라에서는 위험이 날로 절박하였다. 연나라 임금 풍홍이 ‘만일 사태가 위급하게 되면 동쪽의 고구려에 잠시 의탁하고 있다가 후일을 도모해야겠다’ 생각하고는 비밀리에 상서 양이를 우리나라에 보내 망명을 요청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장수왕 24년(A.D.436) 조에는, “여름 4월에 위나라가 연나라의 백랑성(..

카테고리 없음 2012.10.19

윤여동설 - 천년의 수수께끼 임유관(臨渝關)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천년의 수수께끼 임유관(臨渝關)을 찾았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온달열전을 보면, “.......이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遼東)을 침략하니 왕(평원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의 들판에서 맞받아 쳐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용감히 싸워 적병 수십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 용감히 싸워 크게 이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평강상호태열제(평원왕)는 담력이 있고 말타고 활쏘는 것을 잘했으니 곧 주몽의 풍모가 있었다. 대덕으로 개원하고 정치를 잘하였다. 대덕18년 병신(A.D.576)에 제(평원왕)는 대장 온달을 보내 갈석산(碣石山), 배찰산(拜察山)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楡林關)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

카테고리 없음 2012.06.04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택(遼澤)”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택(遼澤)”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요택(遼澤)의 위치는 지금까지 의문의 장소였다. 정확한 요택의 위치를 찾지 못해 우리의 역사해석은 한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안시성에서 철군할 때의 기록이 일자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 권198 당기14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 조를 보면, “․(貞觀 十九年 九月) 癸未 敕班师 先拔辽․蓋二州户口渡辽 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 (서기 645년 9월18일 (안시성에서) 경사로 회군할 것을 명하였다. 요주, 개주 두 주의 백성을 먼저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아래에서 시위하고 개선하였다) ․乙酉 至辽东(9월20일 요동에 이르다) ☆ 안시성에서 요동성까지 2일이 걸렸다. ․丙戌 渡..

카테고리 없음 2012.05.28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 - 최초주장 경주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결정적 증거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단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이 첨성대가 완성된 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 수가 이전보다 폭증했고 질적으로도 정밀해졌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증거가 유성이 떨어진 위치란다. ☆ 옛날에는 육안으로 천문을 관측했을 것인데, 경주 첨성대의 높이가 수백미터 또는 수천미터라면 평지에서 관측하는 것보다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경주 첨성대의 높이는 겨우 9m남짓이란다. 따라서 땅 바닥에서 별을 바라보나 그 꼭대기에 올라가서 별을 바라보나 그게 그것일 것이다. 첨성대를 쌓았다고 해서 천문관측이 폭증하고, 정밀해질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즉 첨성대가 만들어진 이후 삼..

카테고리 없음 2011.04.29

윤여동설 - 북연의 도읍 용성(화룡)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북연의 도읍 용성(화룡)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북연의 도읍 용성(화룡)이 어디인지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도 아닌 북연의 용성(화룡)을 찾으려 애쓰는 것은 그곳이 고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유성(柳城)이고, 고구려 장수왕 때의 고구려 서쪽 경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용성의 위치를 찾으면 옛날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의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1천여리(2천여리라고도 한다)의 땅을 빼앗아 설치했다는 연5군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어 고조선의 옛 땅이 어디까지였는지도 알 수 있어 우리의 고대역사 해석을 지금과는 전혀 새롭게 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고대역사에서 지금까지 확실하게 밝히지 못했던 잃어버린 고리 하나를 찾아 역사 복원에 한발 가까..

카테고리 없음 2010.06.14

윤여동설 - 고구려 안시성(安市城)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안시성(安市城)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3년(A.D.644) 조를 보면,   『가을7월 당나라 태종이 장차 군사를 출동시키기로 하고 홍주, 요주, 강주 3개 주에 명령하여 배 4백 척을 만들어서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도독 장검을 보내어 유주, 영주 두 도독의 군사와 거란, 해, 말갈 등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쳐서 그 형세를 보게 하고,   대리경 위정으로 괴수사를 삼아 하북의 여러 주들은 모두 위정의 지휘를 받게 하고, 위정으로 하여금 상황에 따라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도 먼저 적당히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또 소경 소예에게 명하여 하남 여러 주의 식량을 바닷길로 운반하게 하였다.   겨울10월 당나라 황제(태종)가 ..

카테고리 없음 2007.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