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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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경주 “대릉원(大陵苑)” 현판 글씨 “대릉원(大陵園)”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윤여동시사 – 경주 “대릉원(大陵苑)” 현판 글씨 “대릉원(大陵園)”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경주 대릉원 현판]     지금 경주 대릉원에는 “大陵苑(대릉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박정희 대통령 글씨라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글씨가 잘못 써진게 아닌가 싶다.   혹시 “大陵園(대릉원)”으로 써야 했는데, “大陵苑(대릉원)”으로 썼고 그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이다 보니 당시 아무도 잘못썼다고 지적하지 못하고, 그렇게 그렇게 지금까지 그대로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왕과 왕비의 무덤을 나타내는 능(陵)과 왕족들의 무덤을 나타내는 원(園)의 한자는 원래 이렇고, 그리하여 “陵園(능원)”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보아도, 신라 혁거세거서간을 사릉(..

카테고리 없음 2024.07.30

윤여동설 – 신라 혁거세거서간의 첫 왕비는 알영(閼英)이 아니었다 알영은 두번째 왕비였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 혁거세거서간의 첫 왕비는 알영(閼英)이 아니었다 알영은 두번째 왕비였다 – 최초주장    [혁거세거서간의 어머니 천후성모 사소상]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은 기원전 69년에 서라벌(徐羅伐)의 동쪽알천양산촌 부근의 양산 나정(蘿井)에서 태어나 13세 때인 기원전 57년에 이르러 신라의 첫 왕위에 올랐다가 서기 4년에 73세의 나이로 죽어 탄생지 나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릉(蛇陵)에 묻혔다.  ☆ 사릉원(蛇陵園)은 알천양산촌과 담암사(담엄사라고도 한다) 사이에 위치했고, 혁거세거서간을 비롯한 신라 박씨왕들의 왕릉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혁거세거서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혁거세거서간의 왕비로 기록되고 있는 알영(閼英)이 사실은 혁거세거서간의 첫번째 왕비가 아..

카테고리 없음 2024.07.27

윤여동설 – 백제(대륙백제, 온조백제) 남한성(南漢城), 한성(漢城) 도읍시기 백제왕릉들은 모두 남한성 동쪽 구성(駒城, 용인의 옛이름)에 조성했을 가능성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대륙백제, 온조백제) 남한성(南漢城), 한성(漢城) 도읍시기 백제왕릉들은 모두 남한성 동쪽 구성(駒城, 용인의 옛이름)에 조성했을 가능성 – 최초주장  [대륙백제(온조백제) 왕위계승도] 장                           시조 온조왕(첫도읍 위례성, 남한성으로 도읍이전) 자                                       ↓ 계                                      자(실명 :온조왕보다 먼저 죽었다)승                                       ↓기                               2대 다루왕                                           ↓     ..

카테고리 없음 2024.07.20

윤여동설 – 백제(온조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겼던 이유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온조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겼던 이유 – 최초주장      백제(온조백제, 대륙백제)의 후기 도읍 웅진(熊津)은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도읍인 한성(漢城)을 함락당하고, 개로왕(근개루왕이라고도 부른다)이 잡혀 죽는 비상시국인 475년에 문주왕이 급히 옮겼던 도읍이었다.  그런데 백제는 이 웅진에서 동성왕, 무령왕 대를 거치면서 고구려에 빼앗겼던 땅을 거의 회복함으로써 다시 강국으로 거듭났다.  그렇다면 이때 백제는 굳이 도읍을 옮길 이유가 없었을 것인데, 무령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은 538년에 이르러 웅진(熊津)에서 더 남쪽에 위치한 사비(泗沘)로 다시 도읍을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南扶餘)라 했다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새로운 ..

카테고리 없음 2024.07.13

윤여동설 – 고구려의 진짜 건안성(建安城, 옛 평곽성) 터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진짜 건안성(建安城, 옛 평곽성) 터를 찾았다 – 최초공개   [하북성 승덕시 난평현의 관할구역]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26년(A.D.438) 조를 보면, “봄3월 초에 연(燕, 북연)나라 왕 풍홍(馮弘)이 요동(遼東)에 도착하니 왕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여 말하기를, “용성왕(龍城王) 풍군(馮君)이 들판에서 묵으니 노고가 많소”하니 풍홍이 호칭을 문제삼아 화를 내었다. 왕이 풍홍을 평곽(平郭)에 있게 하였다가 얼마 후 다시 북풍(北豐)으로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요동(遼東), 평곽(平郭), 북풍(北豐)이 언급되는데 우리는 지금 평곽(平郭)이 어디인지, 북풍(北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 고대의 10리는 약2.3km였는데, 지금 낙양에서 북경까지의 고속..

카테고리 없음 2024.07.06

윤여동설 – 고구려 민중원에 조성된 민중왕릉(閔中王陵)은 지금의 북경 서북쪽 연경 고애거(古崖居) 부근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많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민중원에 조성된 민중왕릉(閔中王陵)은 지금의 북경 서북쪽 연경 고애거(古崖居) 부근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많다 – 최초주장  [북경 서북쪽 연경 고애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민중왕 4년(A.D.47) 조를 보면,   “여름4월 왕이 민중원(閔中原)에서 사냥을 하였다.  가을7월 또 (민중원에서) 사냥을 하다가 석굴을 보고는 측근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여기에 장사지낼 것이며, 따로이 능묘를 만들지 말라” 하였다.   5년(A.D.48) 왕이 죽었다. 왕후와 여러 신하들이 왕의 유언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민중왕(閔中王)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 4대 민중왕릉은 민중원(閔中原)이라는 곳의 석굴에 장사지냈음을 알게 한다. ☆ 고구려 왕릉조..

카테고리 없음 2024.06.29

윤여동시사 – 동해안유전펀드를 조성하여 동해 영일만 앞바다 유전 시추 비용을 충당하자

시사 – 동해안유전펀드를 조성하여 동해 영일만 앞바다 유전 시추 비용을 충당하자 [포항 불의 정원 : 포항 앞바다에 석유와 가스가 다량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하는데, 마침 포항에서 가스가 솟아올라 불이 붙어 수년째 불타고 있으니 우연 만은 아닌 듯하다]   대한민국 동해안 영일만 앞바다에 원유와 가스가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단다.  포항 불의정원에도 가스가 수년째 불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양의 많고 적음은 차치하고 부근에 가스가 매장되어 있는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그렇다면 영일만 앞바다 심해를 어떻게든 파 봐야 할텐데 그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 시추하는데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최소한 다섯 군데는 파 봐야 한다는데, 한군데 파 보는데 1,000억원이 넘게 든단다.   무슨..

카테고리 없음 2024.06.23

윤여동설 – 신라 서라벌(徐羅伐)의 진짜 금성(金城)터, 만월성(滿月城)터, 월성(月城)터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라 서라벌(徐羅伐)의 진짜 금성(金城)터, 만월성(滿月城)터, 월성(月城)터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위 : 남쪽과 북쪽에서 바라본 서라벌(只今 遼寧省 錦州市)의 지형]  [금성 추정지(해발 20m쯤에 위치)와 그 동쪽 1리의 알천] 금성(金城) : 경주부 동쪽4리혁거세거서간 21년(B.C.37) 경성(京城)을 쌓고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성이 경주부의 동쪽 4리에 위치했고, 혁거세 때 흙으로 성을 쌓았으며, 둘레가 2,407척이라 하였다. [금성과 월성(반월성)의 중간에 위치했던 만월성 추정지, 해발 19m쯤에 위치] 만월성(滿月城) : 월성 북쪽만월성은 월성의 북쪽에 위치했고,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4,945척이라 하였다. [월성(반월성) 추정지, 해발..

카테고리 없음 2024.06.22

윤여동설 – 신라 51대 진성여왕릉(眞聖女王陵) 조성지 황산(黃山)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라 51대 진성여왕릉(眞聖女王陵) 조성지 황산(黃山)의 위치  - 최초공개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가야의 강역에 대하여,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방향이 약간 비틀려 기록되어 있지만, 가야의 최대 강역이 동쪽은 황산강까지, 서쪽은 지리산까지, 남쪽은 바다에 닿았고, 북쪽은 가야산까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51대 진성여왕 2년(A.D.888) 조를 보면, “왕이 그전부터 각간 위홍(魏弘)과 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항상 궁중에 들어와서 일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 편찬하게..

카테고리 없음 2024.06.16

윤여동설 – 한반도 경상도 낙동강 동쪽은 흉노족 투후(秺侯)계열 왕국이었고, 낙동강 서쪽은 흉노족 성도후(成都侯)계열 왕국이었을 가능성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경상도 낙동강 동쪽은 흉노족 투후(秺侯)계열 왕국이었고, 낙동강 서쪽은 흉노족 성도후(成都侯)계열 왕국이었을 가능성 – 최초주장 [위 : 한반도 경주출토 太祖星漢(태조성한) 명문 비편] [위 : 한반도 경주 금관총 출토 금관] [위 : 흉노족왕국 태조성한왕릉(太祖星漢王陵)으로 비정되는 한반도 경주 봉황대 고분] [위 : 한반도 경주 고분 서역인 무인상]   투후 김성(金星)과 성도후 김탕(金湯) 때 이르러 왕망(王莽)의 신(新, A.D.8-23)나라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에 의해 멸망하고 후한(後漢)이 세워지자, 왕망과 친인척간으로서 신(新)나라에 적극 협조했던 흉노족들은 멸족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 왕망(王莽)의 어머니와 김당(金當)의 어머니는 자매 사이로서 왕..

카테고리 없음 2024.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