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산해관 11

윤여동설 - 가야는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가야는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야가 지금 한반도 가야산의 남쪽, 지리산의 동쪽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인식하고 있으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는 가야의 위치에 대한 기록과는 그 지형이 다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의 서북쪽(필자주 : 사실은 서남쪽이다)에 지리산이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반도의 지리산은 서북쪽이 아닌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산이 가야의 동북쪽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반도의 가야산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수교하고, 때로는 전쟁을 했으며, 결국 후대에 이르러 가야를 병합한 것으로 나타나는 가야 북쪽에 위치했었다..

카테고리 없음 2012.02.25

윤여동설 - 조경일록 속의 백두산은 지금의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조경일록 속의 백두산(白頭山)은 지금의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 최초주장 아래 글은 조선 인조 때 사람인 잠곡 김육 선생이 명나라의 도읍인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쓴 일기인 “조경일록(朝京日錄)” 중 일부로서 북경을 향하여 갈 때의 진황도 산해관에서 북경 통주에 이르는 여정이다. 이때 잠곡은 지금의 한반도 서울을 출발하여 육로로 평양에 도착한 후 석다산에서 배로 갈아타고 연안항로를 따라 요동반도를 돌아 요녕성 금주(錦州) 부근에 도착하여 다시 육로를 이용하여 서쪽으로 흥성, 수중을 지나 산해관을 통과하고, 진황도시, 심하, 유관, 무령, 쌍망을 지나고, 노룡을 지나 난하를 건너 풍윤, 옥전, 계현, 삼하, 통주를 지나 북경에 도착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돌아올 때는 갈 때의 육로와 해로..

카테고리 없음 2010.04.23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남한이 이었다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남한이 이었다    우리의 옛 역사는 환인시대, 환웅시대를 지나며 홍산문화(요하문명)를 꽃피웠고, 고조선에 이르러 청동기문화를, 다시 한과 위만조선, 부여시대에 이르러 철기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부여는 다시 고구려가 되고, 고구려는 한사군 중 임둔군, 낙랑군, 구현토군(낙랑동부도위)과 요동군, 대방군을 흡수함으로써 대제국이 되었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발해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되고, 발해는 다시 요·금·원·청·중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위만조선은 다시 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한사군이 되었다가 고구려에 복속되고,  한은 다시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누어지게 되고, 마한에서 백제가, 진한에서 신라가, 변한에서 가야가 건국되었다가 통일신라가 되..

카테고리 없음 2009.05.14

윤여동설 - 신라 김씨왕들은 정말 흉노족 김일제의 후예들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 김씨왕들은 정말 흉노족 김일제의 후예들일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9년(A.D.65) 조를 보면,   "봄3월 밤에 금성 서쪽 시림 숲 속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자 왕이 날이 새자마자 호공을 보내어 둘러보게 하였더니, 호공이 돌아와 나무 가지에 조그마한 금괴가 걸려 있고 하얀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궤를 가져와 열었더니 그 속에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위품이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하고는 거두어 길렀다.   그가 자라니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으므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카테고리 없음 2009.04.23

윤여동설 -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라?

윤여동설 -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라? 우리나라 사람 중 대부분은 가야가 경남 김해 부근에 위치했다고 인식하고, "임나" 하면 "임나가라(임나국)"와 "임나일본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임나일본부에 대하여 일본학자들은 고대의 왜국이 한반도 남쪽 가야지역으로 진출하여 그곳에 임나일본부라는 것을 설치하고 한반도 남부를 일정기간 통치했다고 주장하고, 우리 학자들은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이 제1 오가야 조를 보면,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를 5가야로 기록하고 있는데, 수로왕의 금관가야까지 합하면 6가야가 된다. 그리고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의 본조사략이라는 사서에는 "태조 천복 5년(A.D.940) 경자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다. 첫째는 ..

카테고리 없음 2009.03.30

윤여동설 - 신라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낙랑은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 30년(B.C.28)부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록을 보면,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침입했는데, 변방 백성들이 밤에 대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가 들에 있는 것을 보고 서로가 말하기를 '이 지방의 백성들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니 가히 도덕이 있는 나라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몰래 군사로서 습격한다는 것은 도둑이나 다름없다. 부끄럽지 않은가? 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라는 이상한 기록인데, 삼국유사 낙랑국 조에는 "국사(國史)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항복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동일한 시기에 대한 신라와 낙랑과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

카테고리 없음 2009.02.15

윤여동설 - 새로 밝히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기록의 진실 - 최초주장

새로 밝히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기록의 진실 - 최초주장 혁거세의 출생시기는 기원전 69년 3월1일이었다. 동부여의 해부루왕에게는 사소(파소라고도 한다)라는 이름의 공주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라서 어느 이름 모를 남자와 혼전관계로 임신이 되어버리자 그 상황을 어찌할 수 없어 동부여에서 도망쳐 동옥저를 거쳐 진한으로 가서 혁거세를 낳게되었고, 그가 13세가 되자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추대하여 왕위에 올리게 되었는데, 이가 바로 신라 건국시조 혁거세거서간이고 때는 기원전 57년이었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사로의 시왕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잉태하여 사람들이 의심하므로 눈수로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카테고리 없음 2008.05.05

윤여동설 - 백제 방어의 요충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방어의 요충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의 기록인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조를 보면, 『당 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대장군 소정방으로 신구도행군대총관을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과 우무위장군 풍사귀와 좌효위장군 방효공 등과 더불어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와서 치게 하고 겸하여 신라왕 김춘추로서 우이도행군총관을 삼아 자기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 현 산동반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나라(신라)의 서쪽 덕물도에 이르니 신라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어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왕(백제 의자왕)이 이 소문을 듣고 여러 신하..

카테고리 없음 2008.04.07

윤여동설 - 한반도 대구는 신라의 달구벌(達句伐)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대구는 신라의 달구벌(達句伐)이 아니다 - 최초주장 신라 31대 신문왕은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죽은 문무왕의 장자였다. 따라서 그는 그 아버지 문무왕으로부터 신라본토와 옛 백제 땅 그리고 고구려 남쪽 땅 일부를 물려받아 그 땅을 아홉 주로 나눈다. 넓어진 강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의 신라지역을 나누어 상주·양주·강주라하고, 옛 백제지역을 나누어 웅주·전주·무주라 하며, 옛 고구려 남쪽지역을 나누어 한주·삭주·명주라 한다. 신당서에는 이때 신라의 강역이 횡으로 1천리, 종으로 3천리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한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북성 당산, 진황도, 요녕성 수중, 호로도, 내몽골 고륜기 부근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 북사 신라전에는 ..

카테고리 없음 2007.10.23

윤여동설 - 고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까지 진출한 기록의 진실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까지 진출했다는 기록은 역사적 사실일까? - 최초주장    [위 : 요동 표시가 된 곳이 지금의 북경이다.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 일원이었고, 고구려와 백제는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여러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A.D.49) 조를 보면,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후한)의 북평(우북평의 오기),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했더니 요동태수 채동이 은의로서 대하므로 다시 화친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놓고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이 지금의 한반도 압록강 북쪽 집안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때 고구려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 멀리 북경..

카테고리 없음 2007.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