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전체 글 1093

윤여동설 - 혁거세는 어떻게 천년왕조 신라의 건국시조가 될 수 있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혁거세는 어떻게 천년왕조 신라의 건국시조가 될 수 있었을까? - 최초주장 파소(사소라고도 한다)라는 이름을 가진 동부여 공주가 어느 남자와 정을 통해 임신이 되자 그를 어찌할 수 없어 동부여에서 도망쳐 눈수, 동옥저를 거쳐 진한 나을촌에 와서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소벌도리가 그를 알고 데려다 길렀고 아이가 자라자 6부의 촌장들이 추대하여 신라의 왕위에 올렸는데 이가 곧 신라 시조 혁거세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에서 양산 아래 나정 우물 부근에서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기 위해 남자들이 엎드려 절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가자 거기에 자줏빛 알 한 개가 있었다는 것은 방금 태어난 어린아이가 있었다는 ..

카테고리 없음 2007.10.18

윤여동설 - 신라의 서라벌(徐羅伐)은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의 서라벌(徐羅伐)은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 최초주장   [금주고탑 부근의 금주시 옛사진(1932) : 이때까지만 해도 성벽이 존재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북사 신라전을 보면,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땅이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 땅(필자주 : 이는 후대 신라가 낙랑 땅의 일부를 차지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이 남겨지게 되었다)이다.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하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진(秦)나라 때 사람들이 고역을 피해 그곳으로 오자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분할하여 주어 그들을 살게 했는데, 그들이 ..

카테고리 없음 2007.10.18

윤여동설 - 백제 멸망 후 그 땅을 나누어 당나라가 설치한 5도독부의 추정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어떻게 나누어 5도독부를 설치했었을까? - 최초공개    서기 660년 7월 18일 백제의 의자왕은 늙은 몸을 이끌고 태자와 대신·장군들을 이끌고 사비성에서 소정방에게 항복함으로써 678년 백제 왕조는 사직을 문닫게 되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들, 신하와 장군 등 93명과 백성 1만2천여 명이 당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조에는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장군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장안으로 호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백 개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지역을 나누어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의 5도독부로 나누어 통치하..

카테고리 없음 2007.10.17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은 왕흥사를 어디에 세웠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은 왕흥사를 어디에 세웠을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법왕 2년(A.D.600) 정월 조를 보면,  "創王興寺 度僧三十人(왕흥사를 창립하고 승려 3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무왕 35년(A.D.634) 조를 보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봄 2월 왕흥사가 낙성되었다. 그 절이 물가에 위치했고 채색과 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했다. 왕이 자주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왕흥사를 준공하는데 무려 34년이나 걸렸음을 알게 하는데, 지금까지 기록으로만 전할 뿐 한반도에서 그 왕흥사의 실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왕 때 백제의 도읍은 사비였으므로 우리는 한반도 충남 부여를 ..

카테고리 없음 2007.10.17

윤여동설 - 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진짜 관미성(關彌城)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진짜 관미성(關彌城)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고대의 패수인 지금의 난하 반가구수고 부근의 지형]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난공불락의 요새였다는 백제의 관미성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일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A.D.392) 조를 보면,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함락 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해수로 둘러져 있기 때문에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한지 20일 만에야 함락시킬 수 있었다(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絶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乃拔)"라고 기록되어 있고,   백제본기 아신왕 2년(A.D.393) 조에는,  "가을 8월 왕이 진무에게 말하기를 '관미성..

카테고리 없음 2007.10.16

윤여동설 - 한반도 충남 공주 부근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백제 왕릉들이 있다?

윤여동설 - 한반도 충남 공주 부근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백제 왕릉들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17 충청도 공주목 산천 조를 보면, "능현은 주의 동쪽 5리에 있다. 옛 능의 터가 있어 그렇게 이름했고 백제왕릉이라 전해지고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학교 향교 조에도, "향교는 주의 서쪽 3리에 있다. (향교의) 서쪽에 옛 능의 터가 있고 백제왕릉이라 전해지고 있는데 어느 왕인지는 알지 못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공주 향교의 서쪽 백제왕릉을 무령왕릉이라 한다면, 공주 동쪽 5리에 있는 능현에 있다는 백제 왕릉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데, 언젠가 그 백제왕릉이 발견되는 날 백제는 다시 한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한반도에 관한 기록으로 생각한다면..

카테고리 없음 2007.10.16

윤여동설 - 동성왕은 웅진 대궐 동쪽 어디에 임류각을 세웠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동성왕은 웅진 대궐 동쪽 어디에 임류각을 세웠을까? - 최초공개 [위 : 한반도 충남 공주 공산성 내에 복원해 놓은 임류각 ㅋㅋ] [위: 웅진 공산(公山) 추정지(진황도 노룡현)] [위 : 웅진성 동쪽 임류각 추정지]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2년(A.D.500) 조에는, "봄에 대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나 되고 또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 잘못을 간하는 신하들이 상소문을 올렸으나 답하지 않고 다시 잘못을 간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문을 닫아버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학자들은 동성왕 때 백제의 도읍이 웅진이었으므로 그 웅진이 지금의 충남 공주였고, 백제의 왕궁이 그곳의 공산성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공산성 동쪽에서 임류각을 찾으려 노력했다...

카테고리 없음 2007.10.15

윤여동설 - 대륙백제와 반도백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대륙백제와 반도백제 - 최초주장 백제에 정말 모도왕(牟都王)이라는 왕이 왕위에 오른 적이 있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되고 있는 백제의 왕위는 시조 온조왕으로부터 31대 의자왕까지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중에 모도왕이라는 백제왕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중국 정사서에는 "모도(牟都)"라는 사람이 백제의 왕위에 오른 적이 있고, 남제에서 작위까지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논쟁의 발단은 남제서 백제국 전에, "(백제 동성왕을)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알자복야 손부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책명으로 모대(동성왕)를 죽은 그의 할아버지 모도(牟都)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봉하며 말하기를 '아 기쁘다. 그대들은 충성심과 부지런함을 대대..

카테고리 없음 2007.10.15

윤여동설 - 북위는 어떻게 백제를 침공할 수 있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북위의 수십만 기병은 어떻게 백제를 침공할 수 있었을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10년(A.D.488) 조를 보면, "위(북위)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침공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패했다" 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때 백제와 북위간에 전쟁이 있었고 백제가 승전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전쟁이 끝난 후 백제의 동성왕은 남제에 표문을 보내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공이 많은 장군들의 관직을 높여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남제서 백제국 전의 기록을 보면, 『"...... 공에 보답하고 열심히 노력한 것을 위로하여 그 이름을 길이 빛나게 하고자 한다. 가행영삭장군 신 저근(姐瑾) 등 네 사람은 충성스럽게도 온 힘을 기울여 국난을 없앴으니 그 뜻의 굳셈과 과감함이 명장의 등급에 오를만하..

카테고리 없음 2007.10.13

윤여동설 - 백제의 22첨로는 어디를 말하는가?

윤여동설 - 백제의 22첨로(檐魯)는 어디를 말하는가?    우리가 "담로"라고 읽고 있는 글자는 나무목변(木)에 "이를 첨(詹)" 자로서 집의 처마라는 의미의 "처마첨(檐)"자이지 담자가 아니다. 따라서 "첨로"라고 고쳐 읽는 것이 옳다.   처음에 어느 학자가 글자형태가 비슷한 처마첨(檐)자와 멜담(擔)자를 혼동하여 첨로를 담로라고 잘못 읽었고, 그후 어느 역사학자도 옥편을 찾아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앵무새 마냥  계속해 담로라고 되뇌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지금 당장 옥편을 찾아 확인해 본다면 필자의 주장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양서 백제 전을 보면,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檐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치성을 고마라 부르고, 읍을 첨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

카테고리 없음 2007.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