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후한낙랑군 18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前漢樂浪郡)과 후한낙랑군(後漢樂浪郡)그리고 서진낙랑군(西晉樂浪郡)의 위치는 각각 다른 곳이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前漢樂浪郡)과 후한낙랑군(後漢樂浪郡)그리고 서진낙랑군(西晉樂浪郡)의 위치는 각각 다른 곳이었다 – 최초주장     [위 : 옛 갈석산(碣石山)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낭아산(狼牙山) 풍경]    전한(前漢) 무제 때인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설치했던 원래의 한사군(漢四郡)은,   낙랑군(樂浪郡, 치소는 고조선(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  진번군(眞番郡, 치소는 우수주였던 지금의 요녕성 능원),  임둔군(臨屯郡, 치소는 명주였던 지금의 내몽골 통요의 고륜기),  현토군(玄菟郡, 치소는 함주였던 지금의 내몽골 적봉의 옹우특기)이었다.   그런데 진번군과 임둔군은 설치된 지 26년 후인 기원전 82년..

카테고리 없음 2024.10.05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기본강역과 주변국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기본강역과 주변국 - 최초주장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초기 전한낙랑군 11현 조선,남감,패수,점선,수성,증지,사망,둔유,누방,혼미,탄열 ☆ 초기 임둔군의 통현은 15개현, 진번군의 통현도 15개현이었다고 하고, 낙랑군의 통현은 11개현으로 나타나는데, 초기 현토군의 통현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소제이후의 전한낙랑군 11현과 낙랑남부도위 7현, 낙랑동부도위 7현 조선,남감,패수,점선,수성,증지,사망,둔유,누방,혼미,탄열[낙랑군] 소명,대방,함자,해명,열구,장잠,제해[낙랑남부도위 : 옛 진번군지역의 일부] 불이,동이,잠대,화려,사두매,전막,부조[낙랑동부도위 : 옛 현토군지역의 일부] 후한낙랑군 18현 조선,감,패수,점선,수성,증지,사망,둔유,누방,혼미,낙도[낙랑군] 소명,대방..

카테고리 없음 2013.03.01

윤여동설 -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

윤여동설 -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 근구수왕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몇째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 375년 11월에 13대 근초고왕(이름은 부여구였다)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백제 14대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10년인 384년 4월에 죽었는데, 그의 성명은 부여수(扶餘須)였다. 왕비는 아이부인(阿爾夫人)으로서 15대 침류왕을 낳았다. 어느 사람은 삼국사기 근구수왕 조의 “一云諱須(일운휘수)”라는 기록을 보고는 근구수왕의 이름이 “휘수(諱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기록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서 이 의미는 “일설에 이르기를 근구수왕의 이름은 수(須)라고 한다” 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근구수왕의 성씨는 백제왕실의 성씨인 “부여(扶餘)”씨였을 것이고, 이름은 “수(須)”로서 "부여수(扶餘須)"가 근구..

카테고리 없음 2011.03.11

윤여동설 - 낙랑의 끈질긴 생명력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의 끈질긴 생명력 - 최초공개 최리의 낙랑국이 서기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공을 받고 항복함으로써 이때 낙랑국이 멸망했으나, 서기 44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살수 이남의 옛 낙랑 땅 일부를 되찾아 다시 설치했던 후한낙랑군. 그런데 이 후한낙랑군도 서기 313년에 이르러 고구려 미천왕에게 그 땅을 빼앗기고 축출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는 더 이상 낙랑군이나 낙랑국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북제의 위수가 지은 위서(魏書) 권5 고종기 제5 화평(和平) 3년(A.D.462) 조를 보니, “봄 정월 계미일에 낙랑왕 만수가 죽었다 (春正月 癸未 樂浪王萬壽薨)”라고 기록되어 있어, 400여 년 전에 이미 멸망했을 낙랑국 왕이라는 의미의 “낙랑왕”이 갑자기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서..

카테고리 없음 2009.08.20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대무신왕은 고구려의 3대왕으로서 2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유리왕의 장자 즉 다물후 송양의 큰딸이 유리왕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 도절은 일찍 죽었고, 유리왕의 계비 화희가 낳은 둘째아들 해명은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로 도읍을 옮기려 할 때 그를 반대하다가 유리왕으로부터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죽었다. 그리하여 유리왕이 다물후 송양의 작은 딸을 다시 왕비로 맞아들여 낳은 아들이 바로 대무신왕 무휼이었다. 무휼(대무신왕)은 자라 1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본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또 갈사왕의 손녀를 둘째 왕비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호동왕자였다. 이때까지도 원비였던 모본호족의 딸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아들을 낳게된다. ..

카테고리 없음 2009.04.21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낙랑남부도위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 낙랑남부도위의 위치 - 최초공개    "낙랑(樂浪)"에 대하여 누차 언급하는 것은 이 낙랑의 위치를 정확히 찾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 강역을 찾는 지름길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할 때 그 도읍인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을 낙랑군의 치소로 삼았기 때문에, 낙랑군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도 그 위치에 대하여 논란이 많은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 왕검성과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정확히 찾을 수 있고, 고조선(왕검조선)과 위만조선의 강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나머지 임둔군, 진번군, 현토군의 위치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전한서 ..

카테고리 없음 2009.04.07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싫든 좋든 우리 고대 역사와 “낙랑(樂浪)”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옛날 고조선 · 위만조선의 도읍이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고, 한사군 때 전한낙랑군의 치소가 왕검성이었으며, 또 고구려의 평양성과 고려의 서경 역시 같은 장소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왕검성 즉 낙랑군의 치소를 정확히 찾는다면 우리 고대 역사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낙랑(樂浪)" 이란 말이 원래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즐거울락(樂)”과 “물결랑(浪)” 자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경치가 좋은 내륙의 큰 강 또는 호수주변이나 큰 바다를 끼고 있는 ..

카테고리 없음 2009.04.03

윤여동설 - 미인들의 나라 동옥저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미인들의 나라 동옥저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후한서 동옥저(後漢書 東沃沮)전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까지이고, 북쪽은 읍루(挹婁)와 부여(夫餘),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했다.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땅이 사방 천리의 절반쯤 된다.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 밭에 씨를 뿌리면 농사가 잘된다. 읍락에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사람들의 성질은 정직하고, 강건하며, 용감하다. 창을 잘 다루어 보병전을 잘한다.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은 (고)구려와 유사하다. 장사지낼 때에는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장이나 되며, 한쪽 끝 부분을 열어놓아 문을 만든다. 새로 사람이 죽게되..

카테고리 없음 2009.03.20

윤여동설 - 대방군은 한반도 황해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대방군은 북경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삼국유사 대방군 조의 새로운 해석 북대방(北帶方)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帶方) 사람들이 낙랑(樂浪)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이것은 모두 전한 때에 설치한 두 군의 이름이다. 그 후에 참람하게도 나라라고 불러오다가 이때에 와서 항복한 것이다). 우리 역사를 찾는데 낙랑군의 위치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듯 이 대방군의 위치 역시 우리 역사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대방군은 후한 건안(A.D.196-220)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 남쪽 황무지를 나누어 설치했다고 전해오는데, 전한낙랑군 25개현 중 대방현이 있으니 대방이라는 명칭은 매우 오래 되었을 것이다. 앞서 위만조..

카테고리 없음 2009.03.04

윤여동설 - 고구려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고구려와 낙랑의 접촉 기록은 3대 대무신왕 15년(A.D.32) 4월 조에, 낙랑왕 최리가 언급되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면서 시작되는데, 사실은 서기 30년에 이미 낙랑동부도위 땅을 고구려가 빼앗았던 듯하다. 그리고 대무신왕 20년(A.D.37) 조에,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다시 27년(A.D.44) 조에, "가을 9월 한나라(후한)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록의 의미를 지금까지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낙랑..

카테고리 없음 2009.02.18

윤여동설 - 백제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된 나라이다.  그런데 백제(百濟)와 낙랑(樂浪)은 백제가 건국된 시점부터 국경을 직접 접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재위 4년(B.C.15) 조를 보면,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재위 8년(B.C.11)조에는, 온조왕이 낙랑과의 접경지역에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우자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 낙랑을 침공하려 하는 것이냐고 항의하면서 의심하지 않게 하려면 성과 목책을 헐어버릴 것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온조왕이 그 요구를 거부하자 그 일로 인하여 백제와 낙랑사이에 화친이 깨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화친이 깨어진 재위 11년(B...

카테고리 없음 2009.02.13

윤여동설 - 최리의 낙랑국은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최리의 낙랑국은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낙랑국(樂浪國)  전한(前漢)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는 이것이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신당서(新唐書)의 주에는,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했다.  국사(國史 : 삼국사기)에는,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 유리왕) 4년에 고구려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 :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방(帶方: 북대방)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 : 후한 광무제)가 사자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카테고리 없음 2009.01.23

윤여동설 - 후한 광무제가 설치한 후한낙랑군의 치소는 북경 동북쪽 하북성 흥륭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후한 광무제가 설치한 후한낙랑군의 치소는 북경 동북쪽 하북성 흥륭 부근 - 최초주장 미우나 고우나 우리 역사는 낙랑군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전개된다. 따라서 우리 역사를 정확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낙랑군의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삼국사기에 낙랑에 대한 기록은 서기 313년까지 나타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한 무제가 설치했던 전한낙랑군이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무려 421년 간 쭉 이어졌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조를 보면,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또 대무신왕 27년(A.D.44) 조를 보면, "한(漢)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

카테고리 없음 2008.12.12

윤여동설 - 고구려와 백제는 왜 개국후 400년간 전쟁을 하지 않았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와 백제는 왜 개국 후 400년 간 전쟁을 하지 않았을까? - 최초주장 고구려의 건국년도는 기원전 37년이고, 백제의 건국년도는 기원전 18년인데, 개국이후 약 400년간 두 나라간에 한번도 전쟁이 없었다. 그러다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13대 근초고왕 24년(A.D.369) 조에,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보기병 2만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 군사를 나누어 민가들을 약탈하므로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갑자기 쳐서 이를 깨뜨리고 적병 5천여 명의 수급을 얻었으며,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는 기록으로부터 두 나라간 전쟁기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6대 고국원왕 39년(A.D.369) 조에도..

카테고리 없음 2008.01.11

윤여동설 - 백제가 지배한 요서 진평현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가 지배한 요서 진평현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송서 백제국 전에는,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1천여 리에 있다. 그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했는데,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百濟國 本與高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麗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백제가 중국의 요서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기록에 나타나는 요서 진평군 진평현이 어디를 말하는지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은 송서 뿐이 아니라 양나라의 역사서인 양서와 양직공도에도 기록되어 있다. 양서에는, "그 나라(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다. 진(晉)나라 때..

카테고리 없음 2007.10.12

윤여동설 -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에 설치되지 않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에 설치되지 않았다 - 최초주장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발해의 산해관 노룡두이다. 앞에 관광객을 싣고 노룡두와 해신묘 앞바다를 한바퀴 돌며 구경 시켜주는 모터보트가 한가롭게 놓여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 것으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그리하여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순체와 양복이란 두 장군을 보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설치한 한사군이 지금의 북한 지역을 나누어 설치되었다고 역사를 이해한다. 즉 육군인 순체는 지금의 요하 쯤에서 출발하여 압록강, 청천강을 건너고, 대동강을 건너 왕검성으로 향했고, 수군인 양복은 산동반도를 출발해 동쪽으로 서해(황해)를 건너 대동강..

카테고리 없음 2007.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