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전체 글 1063

윤여동설 - 신라에서 “군주(軍主)”라는 명칭은 진짜 언제부터 사용했던 것일까?

윤여동설 - 신라에서 “군주(軍主)”라는 명칭은 진짜 언제부터 사용했던 것일까? 삼국사기 신라본기 9대 벌휴이사금 2년(A.D.185) 조를 보면,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임명하여 좌․우 군주(軍主)로 삼아 소문국을 쳤다. ”군주”라는 명칭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라고 ..

카테고리 없음 2016.01.15

윤여동설 - 당 태종이 안시성 동남쪽 모퉁이에 쌓았던 토산(흙산)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당 태종이 안시성 동남쪽 모퉁이에 쌓았던 토산(흙산)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서기 645년 당 태종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의 일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조의 기록을 보면,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안시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토산(흙산)을 쌓고 안시성으로 점점 가까워졌다. 성 안에서도 성을 더욱 높여 방어를 굳게 하고 군사들이 교대하면서 하루에 6,7회씩 싸웠다. 당나라 군사의 돌격차와 기계포의 돌이 성벽을 허물었으나 성안에서 그때마다 목책을 세워서 부서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다쳤는데 당 태종이 몸소 침을 놓아 주었다. 밤낮을 쉬지않고 토산(흙산)을 쌓아 무릇 60일이 걸렸으며 품이 50만이나 들었다. 토산(흙산) 꼭대기가 성..

카테고리 없음 2016.01.10

윤여동설 - 우리 역사해석의 핵심은 고대의 요동군(遼東郡)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우리 역사해석의 핵심은 고대의 요동군(遼東郡) 찾기 - 최초주장 [위 기주협우갈석도 상 어양군, 우북평군, 상곡군은 그 위치가 잘못 배치되어 있다] 우리의 고대 역사는 요동군(遼東郡)이 어디였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지게 된다. 요동군의 위치를 올바르게 찾는 것이 바로 우리 역사해석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고, 고구려의 졸본,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과 백제(대륙백제)의 위례성, 미추홀, 한성, 남한성도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신라, 가야는 백제의 동쪽 또는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삼한인 마한, 진한, 변한도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위만조선도 그 부근에 있었고, 한사군도 그 부근에 있었다. 옛날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카테고리 없음 2016.01.03

윤여동설 - 발해의 홀한하(忽汗河)는 지금의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또는 사간목륜하(査干木倫河)일 가능성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발해의 홀한하는 지금의 시라무렌하 또는 사간무렌하일 가능성 - 최초주장 신당서 북적전 흑수말갈조를 보면, “..........잘 알려진 것이 속말부로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태백산에 이른다. 도태산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에 접했다. 속말수에 의지하여 사는데 이 강의 수원은 (태백)산 서쪽에서 흘러나와 북쪽으로 흘러 타루하(它漏河)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 북적전 발해전을 보면, “만세 통천(A.D.696-697)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남은 무리와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쪽을 거점으로 하여 오루하(奧婁河)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아 수비했다”라고 기록되어 ..

카테고리 없음 2015.12.20

윤여동설 - 신라 최초의 소경 아시촌(阿尸村)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 최초의 소경 아시촌(阿尸村) 찾기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22대 지증왕 15년(A.D.514) 조를 보면,   “봄 정월에 소경을 아시촌(阿尸村)에 설치하고, 가을 7월에 6부와 남쪽지방 사람들로 그곳을 채웠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신라 최초로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을 강역의 북쪽에 설치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런데 이 아시촌소경에 관한 기록은 이후에 전혀 언급되지 않고, 후대에 5소경(중원소경, 북원소경, 금관소경, 서원소경, 남원소경)을 설치할 때에도 일체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아시촌소경이 구체적으로 신라 땅 어디에 설치되었고, 언제까지 존속되었으며, 무슨 이유로 그 이후의 기록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 신증동국여지승..

카테고리 없음 2015.12.12

윤여동설 - 부여씨와 해씨, 고씨의 패권경쟁이 곧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부여씨와 해씨, 고씨의 패권경쟁이 곧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 - 최초주장 부여는 원래 단군왕검의 넷째아들 부여에게 주어진 영지로부터 유래했으므로 국호를 부여라 했고, 고조선의 서쪽지역에 위치했다. 원래 부여왕실의 성씨는 부여씨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월이 흐르자 부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해씨인 해모수가 부여의 왕위를 찬탈하게 되자 그에 반발한 부여씨 동명왕이 다시 왕위를 제자리로 돌려놓게 되고, 패한 해씨들은 북쪽으로 도망쳐 예를 밀어내고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동부여라 한다. ☆ 동부여에게 그 땅을 빼앗긴 예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임둔을 밀어내고 다시 그 땅에 예(동예)를 건설하는데, 이때 밀려난 임둔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혹시 이들이 베링..

카테고리 없음 2015.12.04

윤여동설 - 백제초기 왕위계승의 비밀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초기 왕위계승의 비밀찾기 - 최초주장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 ..................................|............................. ↓ ↓ 2대 부여무서왕 ?(실명) ↓부마(사위) ↓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왕(추모왕) 부여우태 = 소서노 (B.C.66년생) ......................|.................... ↓ ↓ ↓ 유리왕 비류 백제 건국시조 온조왕 ☆ 온조왕은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의 후예이고, 주몽왕(추모왕)은 북부여 건국시조 천제 해모수의 후예로서 서로 혈통이 다르다. 백제시조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는 기원전 66년생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20세쯤에 장자인 비류를 낳았다면 비류는 기원전 47년생이 되고, 2년..

카테고리 없음 2015.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