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국내성 16

윤여동설 - 고구려 삼경(三京) 평양성(平壤城),국내성(國內城), 한성(漢城)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삼경(三京) 평양성(平壤城),국내성(國內城),한성(漢城)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주서 이역전 고려(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는 그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그 땅이 동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를 건너니 동서 2천리요, 남쪽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여 남북이 1천여리였다. 도읍은 평양성(平壤城)으로 그 성은 동서가 6리이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그 외에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는데 별도의 도읍지이다. 그리고 다시 요동과 현토 등 수십 개의 성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 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부르고, 그 외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부른다”라..

카테고리 없음 2016.11.13

윤여동설 - 백제 온조왕의 고향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 온조왕의 고향을 찾았다 - 최초공개 비류와 온조의 진짜 부모는 누구? 백제의 건국시조 비류왕과 온조왕의 부모에 대한 옛 기록들은 매우 혼란스럽다.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과 졸본부여 둘째공주 사이에서 출생했다는 설, 주몽과 월군여인 사이에서 출생했다는 설,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졸본사람인 연타발의 딸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다는 설, 구태와 공손도 딸의 후예설 등이 있는데, 필자가 연구해 보니 비류와 온조는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의 작은 아들의 아들 즉 동명왕의 손자인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다. 즉 비류와 온조는 졸본부여 동명왕의 증손자였던 것이다.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 | ......................................................

카테고리 없음 2012.07.08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정복지 비려 염수와 개선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정복지 비려 염수와 개선로 - 최초주장 호태왕 비문 영락 5년(A.D.395) 을미년 조를 보면, “영락 5년 을미년에 왕이 비려(碑麗)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3개 부(部) 6, 7백영(營)을 격파하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소, 말, 양떼를 노획하고 개선하였다. 양평(襄平) 길을 지나 동쪽으로 ○○성, 역성(力城), 북풍(北豐)을 거쳐 왕이 사냥을 준비시켜 국경도 구경하고 사냥도 즐기면서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여러 지명이 언급되고 있다. 비려(碑麗), 부산(富山), 부산(負山), 염수(鹽水), 양평(襄平), 역성(力城), 북풍(北豐) 등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카테고리 없음 2012.01.13

윤여동설 - 고구려 “신성(新城)” 위치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신성(新城)” 위치찾기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3대 서천왕 조를 보면, “7년(A.D.276) 여름4월 왕이 신성[新城 혹자는 말하기를 신성은 나라 동북에 있는 큰 진이라 한다]에 가서 사냥을 하다가 백록을 잡았다. 가을8월에 왕이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19년(A.D.288) 여름4월에 왕이 신성에 갔다. 겨울 11월에 왕이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14대 봉상왕 조를 보면, “2년(A.D.293) 가을8월에 모용외가 와서 침노하였다. 왕이 신성(新城)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곡림까지 갔는데 모용외가 왕이 달아난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잡히게 되매 왕이 두려워하였다. 이때에 신성성주인 고노자가 기병5백을 거느리고 나와서 왕을 영접..

카테고리 없음 2011.10.21

윤여동설 - 황룡국(黃龍國)은 고구려의 졸본,국내성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황룡국(黃龍國)은 고구려의 졸본,국내성 부근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유리왕 20년(A.D.1) 봄정월 태자 도절이 죽었다. 22년(A.D.3) 겨울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23년(A.D.4) 봄2월에 왕의 아들 해명을 세워 태자를 삼고 전 국내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7년(A.D.8) 봄 정월에 왕의 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 남아 있었는데 힘이 세고 용감하였다. 황룡국(黃龍國)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궁을 선물하였더니 해명이 그 사신 앞에서 활을 잡아당겨 꺾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단단하지 못하다’ 하니 황룡왕이 무안해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황룡왕에게 말하기를 ‘해명은 자식으로서..

카테고리 없음 2011.09.16

윤여동설 - 송양의 비류국(沸流國)은 졸본 서쪽에 위치했었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송양의 비류국(沸流國)은 졸본 서쪽에 위치했었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추모왕 원년(B.C.37) 왕이 비류수 중류에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상류에 사람이 사는 것을 알고 사냥을 하면서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왕 송양이 나와보고 말하기를 ‘내가 궁벽한 바다 모퉁이에 외따로 살기 때문에 아직 군자를 만나보지 못했는데, 오늘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전연 알지 못하겠소’ 하였다. 주몽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자손으로서 아무 아무 곳에 와서 도읍을 정했소’했다.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 대째 왕이 되어 온 터에 땅이 적어 두 임금은 용납할 수 없고, 그대는 도읍을 정한지도 얼마되지 않..

카테고리 없음 2011.09.09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의 일식관측지는 북경 연경(延慶)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의 일식관측지는 북경 연경(延慶) 부근 - 최초주장                     [위: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  [조선초에 고구려 석각천문도를 바탕으로 다시 제작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조선 초에 제작된 돌에 새긴 천문도이다.   그런데 이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평양성에 석각천문도가 있었는데 전쟁통에 잃어버렸고 사본만이 전해져 이를 바탕으로 조선초에 새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고구려 평양성에 돌에 새긴 천문도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 고적 조를 보면, “첨성대 유지(遺址)가 평양부 남쪽 3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고구려에서 석각천문도를 바로 ..

카테고리 없음 2011.02.12

윤여동설 - 호태왕비의 원래 위치는 하북성 승덕시 부근인가?

윤여동설 - 호태왕비의 원래 위치는 하북성 승덕시 부근인가? 고구려의 도읍 졸본, 국내성, 환도성은 지금의 북경 부근이고, 평양성(平壤城), 황성, 장안성은 한반도의 북한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을 고구려의 국내성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그곳의 태왕릉이라는 고총 역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능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19대 왕으로서 16대 고국원왕의 손자였다. 고구려의 도읍 이전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되어 2대 유리왕 22년(A.D.3)에 국내(국내위나암, 국내성)로 도읍을 옮겼다가 10대 산상왕 13년(A.D.209)에 다시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데 ..

카테고리 없음 2011.02.06

윤여동설 - 고구려의 세번째 도읍 환도성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의 세 번째 도읍 환도성의 위치 - 최초주장 고구려 10대 산상왕은 서기198년에 이르러 환도성을 쌓았다. 이는 이때 후한이 말기 현상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산상왕은 상황에 따라서는 요동 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이 환도성을 활용할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후한의 멸망이 거의 기정 사실화되자 209년 10월에 이르러 환도성으로 옮겨살며 요동 쪽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 우리는 지금 집안 북쪽에 위치한 산성자산성을 환도산성일 것이라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이었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중국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 부근이었다.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연경현 영녕고성] 앞서 8대 신대왕은 172년에 ..

카테고리 없음 2008.07.27

윤여동설 -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國內城)의 진짜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國內城)의 진짜 위치 - 최초주장           [영녕고성(고구려 국내성 추정지, 규모 가로세로 각900m, 좌표 동경116도09분35초 북위40도31분25초)]      고구려 2대왕인 유리왕은 그 아버지인 추모왕(주몽왕)으로부터 꽤나 넓어진 강역을 물려받았다.  고구려는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 나라였다. ☆ 주몽은 기원전 58년 봄에 동부여에서 남쪽으로 도망쳐 졸본으로 가서 딸만 셋이 있던 졸본부여 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을 했는데, 그 해 10월에 졸본부여의 왕이 죽으면서 그 왕위를 물려받게 되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어 대제국 고구려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고구려의 건국 시조 추..

카테고리 없음 2008.07.25

윤여동설 -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의 진짜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의 진짜 위치 - 최초주장 [이곳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이 진짜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이다] 많은 사람들은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이 지금의 한반도 압록강 북쪽 요녕성 환인(桓仁)이고, 그곳의 험준한 산꼭대기에 있는 오녀산산성을 졸본성일 것이라 믿고 있다. 학자들이 환인의 오녀산산성이 고구려의 첫 도읍 졸본성일 것이라고 추정하게 된 것은, 환인의 동남쪽이며 호태왕비(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가 서있는 길림성 집안(集安)을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국내위나암)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집안의 서북쪽 멀지 않은 환인의 험준한 오녀산 정상에 오래된 산성이 있자 그곳을 졸본성일 것이라고 추정했던 것인데, 사실 그곳 오녀산산성에서 고구려의 ..

카테고리 없음 2008.07.22

윤여동설 - 고구려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윤여동설 - 고구려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우리는 지금 고구려가 28명의 왕들이 왕위를 이었던 것은 알고 있으나 확실한 고구려 왕릉은 한곳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 평양의 고구려 왕릉을 추모왕릉(주몽왕릉)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북한 학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고, 집안의 태왕릉을 광개토왕릉, 장군총을 장수왕릉이라 하고 있으나 이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보장왕의 능은 당나라 장안에 조성했다고 했으므로 실제 고구려 강역 내에는 27명의 왕릉만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요녕성 환인을 졸본이라 했고, 길림성 집안을 국내성이라 했으며, 북한 평양을 평양성, 황성, 장안성이라 ..

카테고리 없음 2008.05.19

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고구려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고구려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청나라 때의 여름궁전인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피서산장)의 정문인 여정문]    지금 압록강 너머 집안(輯安:集安)에는 호태왕비가 서 있고, 왕릉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고분들과 그 집안 부근에는 돌을 쌓아 만든 적석분들이 즐비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그곳을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國內城)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국내성이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대 유리왕 22년(A.D.3) 조에,  "겨울 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라는 기록과   16대 고국원왕 12년(A.D.342) 조의 "봄 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라는 기록에 따라 지금의 집안을 국내성이라 추정한 것 ..

카테고리 없음 2007.10.09

윤여동설 - 고구려 안시성(安市城)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안시성(安市城)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3년(A.D.644) 조를 보면,   『가을7월 당나라 태종이 장차 군사를 출동시키기로 하고 홍주, 요주, 강주 3개 주에 명령하여 배 4백 척을 만들어서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도독 장검을 보내어 유주, 영주 두 도독의 군사와 거란, 해, 말갈 등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쳐서 그 형세를 보게 하고,   대리경 위정으로 괴수사를 삼아 하북의 여러 주들은 모두 위정의 지휘를 받게 하고, 위정으로 하여금 상황에 따라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도 먼저 적당히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또 소경 소예에게 명하여 하남 여러 주의 식량을 바닷길로 운반하게 하였다.   겨울10월 당나라 황제(태종)가 ..

카테고리 없음 2007.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