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낙랑국 15

윤여동설 - 낙랑의 끈질긴 생명력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의 끈질긴 생명력 - 최초공개 최리의 낙랑국이 서기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공을 받고 항복함으로써 이때 낙랑국이 멸망했으나, 서기 44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살수 이남의 옛 낙랑 땅 일부를 되찾아 다시 설치했던 후한낙랑군. 그런데 이 후한낙랑군도 서기 313년에 이르러 고구려 미천왕에게 그 땅을 빼앗기고 축출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는 더 이상 낙랑군이나 낙랑국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북제의 위수가 지은 위서(魏書) 권5 고종기 제5 화평(和平) 3년(A.D.462) 조를 보니, “봄 정월 계미일에 낙랑왕 만수가 죽었다 (春正月 癸未 樂浪王萬壽薨)”라고 기록되어 있어, 400여 년 전에 이미 멸망했을 낙랑국 왕이라는 의미의 “낙랑왕”이 갑자기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서..

카테고리 없음 2009.08.20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대무신왕은 고구려의 3대왕으로서 2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유리왕의 장자 즉 다물후 송양의 큰딸이 유리왕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 도절은 일찍 죽었고, 유리왕의 계비 화희가 낳은 둘째아들 해명은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로 도읍을 옮기려 할 때 그를 반대하다가 유리왕으로부터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죽었다. 그리하여 유리왕이 다물후 송양의 작은 딸을 다시 왕비로 맞아들여 낳은 아들이 바로 대무신왕 무휼이었다. 무휼(대무신왕)은 자라 1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본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또 갈사왕의 손녀를 둘째 왕비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호동왕자였다. 이때까지도 원비였던 모본호족의 딸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아들을 낳게된다. ..

카테고리 없음 2009.04.21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낙랑남부도위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 낙랑남부도위의 위치 - 최초공개    "낙랑(樂浪)"에 대하여 누차 언급하는 것은 이 낙랑의 위치를 정확히 찾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 강역을 찾는 지름길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할 때 그 도읍인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을 낙랑군의 치소로 삼았기 때문에, 낙랑군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도 그 위치에 대하여 논란이 많은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 왕검성과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정확히 찾을 수 있고, 고조선(왕검조선)과 위만조선의 강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나머지 임둔군, 진번군, 현토군의 위치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전한서 ..

카테고리 없음 2009.04.07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싫든 좋든 우리 고대 역사와 “낙랑(樂浪)”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옛날 고조선 · 위만조선의 도읍이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고, 한사군 때 전한낙랑군의 치소가 왕검성이었으며, 또 고구려의 평양성과 고려의 서경 역시 같은 장소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왕검성 즉 낙랑군의 치소를 정확히 찾는다면 우리 고대 역사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낙랑(樂浪)" 이란 말이 원래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즐거울락(樂)”과 “물결랑(浪)” 자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경치가 좋은 내륙의 큰 강 또는 호수주변이나 큰 바다를 끼고 있는 ..

카테고리 없음 2009.04.03

윤여동설 - 대방군은 한반도 황해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대방군은 북경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삼국유사 대방군 조의 새로운 해석 북대방(北帶方)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帶方) 사람들이 낙랑(樂浪)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이것은 모두 전한 때에 설치한 두 군의 이름이다. 그 후에 참람하게도 나라라고 불러오다가 이때에 와서 항복한 것이다). 우리 역사를 찾는데 낙랑군의 위치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듯 이 대방군의 위치 역시 우리 역사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대방군은 후한 건안(A.D.196-220)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 남쪽 황무지를 나누어 설치했다고 전해오는데, 전한낙랑군 25개현 중 대방현이 있으니 대방이라는 명칭은 매우 오래 되었을 것이다. 앞서 위만조..

카테고리 없음 2009.03.04

윤여동설 - 고구려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고구려와 낙랑의 접촉 기록은 3대 대무신왕 15년(A.D.32) 4월 조에, 낙랑왕 최리가 언급되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면서 시작되는데, 사실은 서기 30년에 이미 낙랑동부도위 땅을 고구려가 빼앗았던 듯하다. 그리고 대무신왕 20년(A.D.37) 조에,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다시 27년(A.D.44) 조에, "가을 9월 한나라(후한)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록의 의미를 지금까지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낙랑..

카테고리 없음 2009.02.18

윤여동설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윤여동설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고구려 대무신왕에게는 호동이라는 아주 잘 생긴 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전해지고 있어 우리는 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지금까지 매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의 사랑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서 전한 왕실의 외척이었던 왕망은 서기 9년 1월 10일에 이르러 쇠약해진 전한(前漢)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나라인 신(新)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르는데, 이 혼란기를 틈타 낙랑군태수(조선사람이 그 땅을 되찾아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였던 최리는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전한낙랑군 땅과 낙랑동부도위 땅을 ..

카테고리 없음 2009.01.29

윤여동설 - 최리의 낙랑국은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최리의 낙랑국은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낙랑국(樂浪國)  전한(前漢)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는 이것이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신당서(新唐書)의 주에는,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했다.  국사(國史 : 삼국사기)에는,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 유리왕) 4년에 고구려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 :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방(帶方: 북대방)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 : 후한 광무제)가 사자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카테고리 없음 2009.01.23

윤여동설 - 한4군(漢四郡) 은 단단대령(칠로도산)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4군(漢四郡)은 단단대령(칠로도산)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 최초주장 한사군의 설치지역에 대해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들이 서로 달라 아직까지도 명확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자 어떤 이는 중국 사람들이 위만조선과 한(漢) 나라와의 전쟁에서 실제는 한(漢) 나라가 패했으나 이를 숨기고 한(漢) 나라가 승리했다고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실제 설치된 적도 없는 한사군이라는 유령 군들을 설치했던 것처럼 꾸며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도 나타나게 되었다. 한사군이 실제 설치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정리해보면, 첫째는 사마천 생존시에 쓰여진 사기 조선전에 "조선을 평정하고 네 군으로 만들었다"고 만 기록했을 뿐 구체적으로 낙랑, 진번, 임둔, 현토(필자주 :..

카테고리 없음 2008.12.08

윤여동설 -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와 낙랑왕 최리의 딸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 [호동왕자와 낙랑공주가 밤을 지새웠을 낙랑국왕성 전경도] 우리는 지금 고구려 대무신왕의 맏아들인 호동왕자와 낙랑왕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를 매우 안타깝게 ..

카테고리 없음 2008.09.05

윤여동설 - 대무신왕 - 무력을 귀신처럼 휘두른 전쟁의 신

대무신왕 - 무력을 귀신처럼 휘두른 전쟁의 신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의 아버지는 유리왕이요,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작은 딸로서 유리왕 23년(A.D.4)에 태어났다. 유리왕은 처음에 송양의 큰딸을 왕비로 삼았는데, 첫 아들인 도절을 낳고는 그 후유증으로 바로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뒤 화희와 치..

카테고리 없음 2008.09.03

윤여동설 - 한사군의 원래위치와 2군 1도위로의 변화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사군의 원래위치와 2군 1도위로의 변화도 - 최초주장 전한서의 원문과 해석문을 함께 올리는 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 상식과 같이 옛날 한나라의 현토군이 한반도의 함경도 지방에 위치했는지, 아니면 필자의 주장과 같이 (원래 내몽골 옹우특기 부근에 있다가) 북경(옛 요동군이었다) 서북쪽 부근으로 옮겼는지, 낙랑군이 북한 평양 부근에 설치되었는지 아니면 필자의 주장과 같이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설치되었는지를 확인해 보라는 의미이니, 지도를 펴놓고 지명을 짚어가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현토군(玄토郡) (전한) 무제 원봉 4년(B.C.107)에 설치했다. 고구려를 왕망이 하구려라 했다. 유주에 속한다.[응소는 말하기를 옛 진번조선호(고)국이라 했다] 호수는 45,006호이고, 인구는 221..

카테고리 없음 2008.03.28

윤여동설 - (2)대륙 낙랑군, 평양 낙랑국 분리설은 거짓말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낙랑군은 대륙에 있었고,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다(후편) - 최초주장 [전편에서 계속] [일제강점기에 발견 되었다는 낙랑 점제현 신사비 - 역사 왜곡을 위해 일제가 갈석산 부근으로부터 옮겨왔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한반도 역사와 대륙역사를 어떻게 연결 지어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지금까지 그 관계를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낙랑군과 낙랑국 그리고 후한 광무제가 살수이남 땅에 설치했던 후한낙랑군과의 관계는 그리 혼란스러워 할 일이 아니다. 기원전 194년 위만이 준왕의 왕검성인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갑자기 쳐서 빼앗아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고조선의 준왕은 그 남쪽으로 도망쳐 지금의 하북성 당산 풍윤부근에 다시 도읍을 정하고 한왕에 올랐다...

카테고리 없음 2007.12.13

윤여동설 - (1) 대륙 낙랑군, 평양 낙랑국 분리설은 거짓말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낙랑군은 대륙에 있었고,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다(전편) - 최초주장 [하북성 승덕시 경추산]  [하북성 승덕시 쌍탑산]   [진황도 창려현의 갈석산 입구에 있는 글- 천년의 수수께끼를 어찌 풀 수 있을 것인가?라고 쓰여 있는데, 이 산은 아홉명의 황제들이 올랐다는 원래의 우공갈석이 아니라 후대인 명나라때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낭아산이다]      옛날 위만은 오갈 데 없던 자신의 망명을 받아들여주고 박사로 임명해 나라의 서쪽 변경에 영지까지 내려주었던 고조선 준왕의 은혜를 배반하고, 한나라 군이 열 군데 길로 침공해 오니 왕검성으로 가서 왕을 보호하겠다고 거짓말로 보고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왕검성으로 온 뒤 갑자기 돌변하여 준왕이..

카테고리 없음 2007.12.12

윤여동설 - 고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까지 진출한 기록의 진실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까지 진출했다는 기록은 역사적 사실일까? - 최초주장    [위 : 요동 표시가 된 곳이 지금의 북경이다.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 일원이었고, 고구려와 백제는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여러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A.D.49) 조를 보면,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후한)의 북평(우북평의 오기),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했더니 요동태수 채동이 은의로서 대하므로 다시 화친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놓고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이 지금의 한반도 압록강 북쪽 집안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때 고구려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 멀리 북경..

카테고리 없음 2007.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