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졸본부여 13

윤여동설 - 세 부여(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의 진짜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세 부여(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의 진짜위치 찾기 - 최초주장 동명왕의 졸본부여가 북부여를 병합하자, 북부여의 해부루가 유민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예(창해군)의 땅을 빼앗아 차지하고 동부여를 건국하게 되고, 동부여에게 그 땅을 빼앗긴 예는 다시 동쪽으로 개마산을 넘어 임둔군 땅으로 이동하여 그 땅을 빼앗아 예(동예)를 부활시키게 된다. 초기 현토군은 옥저가 되고, 진번군은 맥국이 되며, 진한은 신라가 되고, 변한은 가야가 된다. 한편 기원전 58년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부여로 와서 아들 없이 딸만 셋을 둔 졸본부여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한 후 그 왕위를 물려받은 주몽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그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게 되고, 후일에 이르러 고구려는 낙랑군을 축출하고 옥저, 동예, 맥..

카테고리 없음 2018.12.09

윤여동설 - 거란(요)은 부여문화권에 속했던 민족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거란(요)은 부여문화권에 속했던 민족 - 최초주장 부여는 아주 먼 옛날 고조선 단군왕검의 아들 부여에게 주어졌던 나라 서쪽의 영지였고, 후일에 이르러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가 되었다. ☆ 북부여는 졸본부여에 병합되었고, 졸본부여는 후일 고구려가 되었으며, 동부여는 5백여년 후 고구려에 통합되었다. 북부여는 해모수가 건국하여 기원전 232년에 천제의 자리에 올라, 해모수리, 해해사, 해우루, 해부루로 왕위가 이어졌고, 졸본부여는 동명왕이 기원전 108년에 건국하여 기원전 86년에 북부여를 병합하였다. 그러자 북부여 해부루왕은 북부여 땅을 빼앗기고 일부 유민들을 이끌고 동북쪽으로 이동해 가서 다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게 되고, 다른 일부 역시 북부여를 떠나 흩어져 실위, 고막해,..

카테고리 없음 2015.04.12

윤여동설 - 졸본부여와 백제 초기 왕위계승도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졸본부여와 백제 초기 왕위계승도 - 최초공개                 졸본부여건국시조 동명왕(이름이 부여두막 혹은 두막루라 한다)......................................↓.................................. ↓                                            ↓2대 부여무서왕                            ?(실명) ↓                                            ↓3대 주몽왕(추모왕)                     우태(소서노와 혼인)(부여무서왕의 둘째부마, 고구려 건국시조)                                           ..

카테고리 없음 2012.07.23

윤여동설 - 백제(대륙백제, 온조백제) 비류왕과 온조왕은 쌍둥이 형제였을 가능성이 많다

윤여동설 - 백제(대륙백제, 온조백제) 비류왕과 온조왕은 쌍둥이 형제였을 가능성      “백제의 건국시조 비류왕과 온조왕이 쌍둥이 형제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확인되지 않은 또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보자.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이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여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일설에는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로서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이다. 우태가 죽은 뒤 (소서노가) 졸본에 홀로 살..

카테고리 없음 2012.07.01

윤여동설 - 소서노와 비류 온조의 남하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소서노와 비류 온조의 남하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유리를 말함)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드디어 오간, 마려 등 열명의 신하들을 데리고 남쪽지방으로 떠나니 백성들 중에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이리하여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서 살만한 곳을 살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기이 제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조에는, “고전기(古典記)에 이르기를, ”동명왕의 세째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유년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년에 도읍을 한산(漢山:지금의 광..

카테고리 없음 2011.06.24

윤여동설 - 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홀본)으로 간 남하로 찾기

윤여동설 - 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홀본)으로 간 남하로 찾기 [지금 중국에서는 원 상도유지(원 상도성터)라 하고 있는데 이곳은 옛 동부여의 도읍 부여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은 22세 때에 동부여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자 그곳에서 남쪽으로 도망쳐 엄호수(호태왕비문에는 엄리대수라고 하였다)를 건너 졸본(홀본)으로 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 왕의 둘째공주와 혼인을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그후 주몽이 부여(동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 2년 봄2월에 남쪽으로 도망쳐 졸본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위서 고구려전에는 “주몽은 오인, 오위 등 두 사람과 함께 부여(동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라고 하였다. 두 기록이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친 방향을..

카테고리 없음 2011.06.17

윤여동설 - 한(漢) 고조 유방과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관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漢) 고조 유방과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관계 - 최초주장 지금 중국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漢)나라가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도움을 받아 건국된 나라였다고 하면 중국 사람들에게는 자존심 상할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전한서 권1상 고제기 제1상 4년(B.C.203) 조를 보면, “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 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貉在東北方三韓之屬皆貉類也” 라는 안사고의 주가 달려 있다. 이의 뜻은 “기원전 203년에 북맥과 연나라가 용감한 기병을 보내와 한나라를 도왔다"라는 뜻이고, “맥은 동북방에 있는 삼한의 지속으로 모두 맥류이다”라는 뜻이다. ☆ 중국 사람들은 주변의 민족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나누어 불렀..

카테고리 없음 2010.08.16

윤여동설 - 동명왕(東明王)은 주몽이 아니라, 백제 온조왕의 증조할아버지를 말한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동명왕(東明王)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로서 백제 온조왕의 증조할아버지이다 - 최초주장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부여(扶餘)에는 북부여와 졸본부여 그리고 동부여가 있었다.  부여(扶餘)는 원래 단군왕검의 막내아들 부여(扶餘)에게 봉해진 나라였다.   따라서 그 후예들은 국호를 부여(扶餘)라 했고, 성씨도 부여(扶餘)씨로 자처하게 된다.   그런데 2천여년 후 부여는 성씨가 다른 해씨 즉 해모수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해모수가 부여왕실과 무슨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해(解)씨를 성씨로 삼은 것을 보면 부여의 직계혈손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필자주 : 외손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이때 부여에 역성혁명이 일어나 부여씨에서 해씨로 왕실의 성씨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데, 부여라는 국호는 ..

카테고리 없음 2010.01.16

윤여동설 - 고구려 900년설과 700년설의 진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900년설과 700년설의 진실 - 최초주장 고구려가 건국된 지 705년 만에 멸망했다고 하는 것이 "고구려 700년설"이고, 900년 만에 멸망했다고 하는 것이 "고구려 900년설"이다. 고구려 700년설은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어 서기 668년에 멸망함으로써 705년간 존속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대두된 설이고, 고구려 900년설은 신당서 고구려전에 시어사 가언충이 당 고종에게 보고하는 말 중에 "고구려가 한(漢)나라 때부터 나라가 있어 지금 900년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대두된 설이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조에는 또 고구려가 멸망한 후 문무왕이 신라로 망명해 온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삼는 책명문에 "공의 태조 중모왕은 덕을 북쪽 산에 쌓고 ..

카테고리 없음 2009.06.04

윤여동설 - 주몽과 유리가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친 진짜 이유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주몽과 유리가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친 진짜 이유 - 최초주장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은 동부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유화부인이고, 아버지는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증손자인 해불리지(필자주 : 혹시 해불리지의 아들의 오기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이다. 해불리지가 압록강가를 지나다가 하백(어부)의 딸인 유화를 겁탈하여 임신시키게 되고, 유화의 아버지인 하백은 시집도 안간 처녀가 임신했다 하여 자기 집에서 내쫓아버린다. 그리하여 유화는 동부여로 가서 주몽을 낳게되고 그곳에서 살게된다. 세월은 흘러 주몽은 자라 동부여 왕궁의 말지기가 되고, 예씨라는 여인과 혼인을 하였는데, 예씨가 임신 중에 있을 때 갑자기 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동..

카테고리 없음 2008.08.31

윤여동설 - 동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동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위 : 내몽골 정람기 동북쪽에 위치한 대형고성터. 지금 중국에서 원 상도유지라고 하고 있으나 사실 이곳은 옛 예성(濊城)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위 : 내몽골 정람기에 위치한 고성터로서 지금 사랑성(四郞城)이라 부르고 있다]    부여는 아주 오래된 나라의 이름이다.  옛날 고조선의 건국시조 단군 왕검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장자는 부루, 둘째는 부소, 셋째는 부우, 막내는 부여(夫餘, 扶餘)였는데, 단군왕검이 왕검성의 서쪽지역을 부여에게 영지로 내려주게 되어 나라 이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부여는 고조선이 멸망하자 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북부여는 고구려 왕실에 혈통..

카테고리 없음 2008.06.29

윤여동설 - 고구려 900년 존속설과 부흥운동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900년 존속설과 부흥운동 - 최초주장 우리 민족 역사에서 가장 광대한 강역을 일구었던 고구려의 멸망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우리가 지금도 매우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런데 당나라 사람인 가언충이라는 사람은 고구려비기라는 예언서에 고구려가 건국된 지 900년 만에 80대장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다고 하고, 고구려가 멸망한 서기 668년이 건국된 지 꼭 900년이 되는 해였다고도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상한 것은 어떻게 서기 668년이 고구려가 건국된 지 900년이 되는 해라고 말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사 상식으로는 ..

카테고리 없음 2007.10.09

윤여동설 - 잃어버린 나라 동부여는 대흥안령 서쪽 내몽골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잃어버린 나라 동부여는 대흥안령 서쪽 내몽골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부여는 셋이다. 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가 그것이다. ☆ 후일 백제의 성왕이 웅진으로부터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나고 있으나, 이후에도 백제는 남부여라 하지 않고 백제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백제는 졸본부여의 후예가 세운 나라였다. 북부여의 건국시조는 천제 해모수이고, 졸본부여의 건국시조는 동명왕이며, 동부여의 건국시조는 해부루왕이다. 삼국유사 기이 제1 북부여 조에는, "고기에 말하기를, '전한 선제 신작 3년 임술(B.C.59)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 요나라 의주 경계에 있다)에 내려왔다. 오룡거를 타고 도읍을 정..

카테고리 없음 2007.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