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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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서라벌 남산(南山) 서쪽 기슭의 진짜 포석정(鮑石亭) 터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라 서라벌 남산(南山) 서쪽 기슭의 진짜 포석정(鮑石亭) 터를 찾았다 – 최초공개 [진짜 포석정터 :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남산 서쪽 기슭, 좌표 : 동경121도06분53초 북위41도04분21초] 삼국사기 신라본기 55대 경애왕 4년(A.D.927) 조를 보면, “강주(康州) 산하 돌산(突山 필자주 : 돌산고허촌, 남촌) 등 4개 고을이 태조(필자주 : 고려태조 왕건)에게로 귀순하여 왔다. 가을9월 견훤이 고울부(高鬱府)를 침공하므로 왕이 태조(왕건)에게 구원을 청하니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강한 군사 1만으로서 구원하게 하였다. 이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견훤이 겨울 11월에 신라의 왕경(王京)을 습격하여 왔다. 이때 왕이 비빈종척(妃嬪宗戚)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

카테고리 없음 2021.12.26

윤여동설 – 세 부여(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의 삼각관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세 부여(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의 삼각관계 – 최초주장 단군왕검 천제 해씨 해씨 넷째아들 해모수 |→ 해모수 북부여 → 해부루 동부여(가섭원부여) 부여 → 부여 → | |→ 동명왕 졸본부여 | → 추모 고구려(해씨,고씨) 부여씨 | | → 온조 백제(부여씨) ☀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이었던 부여씨(扶餘氏)의 맥이 졸본부여의 동명왕과 백제 온조왕으로 이어졌으니 백제가 고조선(왕검조선)의 정통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사상 나타나는 부여(扶餘)는 넷이다.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의 서쪽방향에 위치했으며, 단군왕검의 넷째 막내아들 부여(扶餘)에게 봉했던 원래의 부여(扶餘)가 있었고,[필자주 : 하북성 장가구시 일원] 고조선(왕검조선) 말기에 왕실의 외척으로 보이는 해모수(解慕漱)가 기원전..

카테고리 없음 2021.12.18

윤여동설 – 신장위구르 타림분지(타클라마칸사막) 생성의 비밀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장위구르 타림분지(타클라마칸사막) 생성의 비밀 - 최초공개 신장위구르 타림분지(타클라마칸사막)는 세계 최대의 크레이터(운석충돌구)였다. 운석을 찾으려면 그곳으로 가야한다. 타림분지(타클라마칸사막)는 한반도 보다도 넓은 곳인데, 이 정도 넓이의 충돌구(크레이터)가 형성될 정도라면, 운석이 떨어졌던 당시에 그 부근에 살던 모든 인간과 동물은 그 충격파로 인하여 전멸했을 것이다. [14,000년전 흑피옥 조각품(내몽골 화덕 부근 출토)을 만든 사람들도 이 운석충돌의 충격파와 기후변화로 멸종했을지도 모른다] [코뿔소 머리모양의 왼쪽 눈에 해당하는 아프리카 대륙의 빅토리아호도 운석충돌구(크레이터)일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카테고리 없음 2021.12.11

윤여동설 - 고려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9성을 쌓았던 곳은 옛 북옥저(北沃沮) 땅이었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려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9성을 쌓았던 곳은 옛 북옥저(北沃沮) 땅이었다 – 최초공개 고려는 1107년 10월에 이르러, 여진(女眞) 정벌을 위해 17만의 별무반을 출동시키기로 결정하고, 윤관 장군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는다. 그리고 여진 정벌을 위해 출병하는 장수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예종은 11월9일 개경을 출발하여 15일에 서경에 도착했고, 12월에 이르러 왕은 윤관 장군과 오연총에게 부월을 하사함으로써 군사들의 출발을 명령했다. 그리하여 왕의 명을 받은 윤관장군은 별무반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여진을 축출하고 그곳에 아홉 개의 성을 쌓는다. 소위 고려 동북9성인데, 영주성(英州城)을 몽라골현(몽라골령이라고도 한다) 아래에 9백50칸 규모로 쌓았고, 웅주성(雄州城)..

카테고리 없음 2021.12.05

윤여동설 – 고려의 청자(靑瓷)에서 조선의 백자(白瓷)로 갑자기 변화된 숨겨진 이유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의 청자(靑瓷)에서 조선의 백자(白瓷)로 갑자기 변화된 숨겨진 이유 - 최초주장 [위 : 고려상감청자주병] [조선백자무문주병] 대체적으로 고려시대 사람들은 청자(靑瓷)를 매우 선호했다고 전해지고 있고, 조선시대 사람들은 청자보다는 백자(白瓷)를 더 선호하며 사용했고, 그 전통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현대인들도 백자를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고려시대 사람들은 푸른 청자를 진짜 비취옥으로 만든 그릇인양 애지중지 하며 그 대체품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바로 후대인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그토록 귀한 청자를 버리고 새롭게 하얀 백자를 만들어 사용했던 것일까? 단순하게 백자가 청자에 비하여 깨끗해 보이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풍기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던 것일까? 물론 무슨 물건이던지 수백 년을 이어 ..

카테고리 없음 2021.11.27

윤여동설 – 청자(靑瓷)는 비취옥기(翡翠玉器)의 대체품이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청자(靑瓷)는 비취옥기(翡翠玉器)의 대체품이었다 - 최초주장 세상 사람들은 왜 그 하고 많은 그릇 중에서 하필이면 색깔이 초록빛인 청자(靑瓷)를 선호하고 귀하게 여기게 되었던 것일까? 언뜻 생각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이유가 의외로 간단해진다. 그것은 바로 그 빛깔이 예로부터 천지의 정수(精髓)로 여겨온 옥(玉) 특히 비취옥(翡翠玉)을 닮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옥(玉)이란 아주 먼 옛날부터 귀한 보물이라서 누구나 가지고 싶어 했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는 부자라 하더라도 그 값비싼 옥을 마음껏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고, 더구나 모든 생활용품을 진짜 옥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충분히 짐작이..

카테고리 없음 2021.11.20

윤여동설 – 한반도에는 어떠한 낙랑(樂浪)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에는 어떠한 낙랑(樂浪)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 최초주장 한반도에는 어떠한 낙랑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낙랑군도 없었고, 최숭이나 최리로 대표되는 낙랑국도 없었다. 왜냐하면 환인의 환국, 환웅의 단국, 왕검의 조선(고조선)과 부여, 예, 개마, 옥저 그리고 위만조선과 삼한이 모두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발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 환단고기 단군세기 13세 단군 흘달 조를 보면, “갑오16년(B.C.1782) 이해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흘달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돕게 하니 은나라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이 조약..

카테고리 없음 2021.11.07

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과 고구려,백제,신라,가야,고려까지의 천문관측지는 발해 북쪽이 확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과 고구려,백제,신라,가야,고려까지의 천문관측지는 발해 북쪽이 확실 - 최초공개 [필자가 밝힌 고대의 요동과 발해 북쪽 고조선(왕검조선)과 삼한 그리고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와 고려의 중심강역] [박창범이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밝힌 백제의 일식 최적관측지의 중심지가 지금의 발해 북쪽 지역인데, 윤여동설에 따르면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중심 강역이 바로 이 지역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천문관측 기록] 온조왕 6년(B.C.13) 가을7월 그믐날 신미에 일식이 있었다. 다루왕 7년(A.D.34) 여름4월 동방에 붉은 기운이 나타났다. 46년(A.D.73) 여름5월 그믐날 무오에 일식이 있었다. 기루왕 9년(A.D.85) 여름4월 을사에 객..

카테고리 없음 2021.10.24

윤여동설 – 한반도 지리산은 가짜, 진황도 창려의 갈석산(碣石山)이 진짜 지리산(智異山)이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지리산은 가짜, 진황도 창려의 갈석산(碣石山)이 진짜 지리산(智異山)이었다 - 최초주장 [역사의 착각 신악갈석(神岳碣石). 진황도 창려에 있는 가짜 갈석산을 진짜처럼 믿게 만들고 있는 갈석산 표지석] 삼국사기 신라본기 42대 흥덕왕 3년(828) 12월 조를 보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문종이 인덕전에서 그를 불러 차등을 두어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茶) 종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지리산(地理山, 智異山)에 심게 하였다. 차(茶)가 선덕왕(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매우 유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에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삼국사기 기록을 읽..

카테고리 없음 2021.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