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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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당 태종이 올랐던 안시성 밖 주필산(駐蹕山)을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당 태종이 올랐던 안시성 밖 주필산(駐蹕山)을 찾았다 - 최초주장 서기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난 후 진군하여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할 때 올랐다고 전해지는 “주필산(駐蹕山)”이 지금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는 산을 말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고구려 난공불락의 요새 “안시성(安市城)”의 위치 자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옛 요동을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이라고 이해하는 한 “건무 25년(A.D.49) 봄에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 하는 것을 요동태수 채동이 은의와 신의로 대하니 모두 요새 밖으로 철수하였다”라는 후한서 고구려전 구려 조의 기록을 설명할 수 없고, 중국 사서들에 “고구려와 백제..

카테고리 없음 2014.02.15

윤여동설 - 고구려의 “고국(故國)”과 발해의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는 같은 곳인가?

윤여동설 - 고구려의 “고국(故國)”과 발해의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는 같은 곳인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읽다보면 “고국(故國)”이라는 지명이 여러 번 언급된다. 8대 신대왕이 죽자 고국곡(故國谷)에 장사지냈다고 하였고, 9대 고국천왕의 능은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조성했다고 했으며, 16대 고국원왕(국강상왕)은 고국지원(故國之原)에 장사지냈고, 18대 고국양왕의 능은 고국양(故國壤)에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기록 속 “고국(故國)”의 위치를 확실히 밝힌 사람은 없다. 아직까지 고구려 “고국(故國)”의 위치를 확실하게 밝힐 수 없었던 것은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이 어디인지 몰랐고, 국내성을 엉뚱하게도 압록강 북쪽 집안이라 하며, 환도산성 역시 그 부근이라 하였으며, 평양성을 한반..

카테고리 없음 2014.02.10

윤여동설 - 창해군 사건 - 위만조선 멸망 - 한사군 설치 - 이군으로 축소 -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의 흥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창해군 사건 - 위만조선 멸망 - 한사군 설치 - 이군으로 축소 -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의 흥기- 최초주장 후한서 예전을 보면, “원삭 원년(B.C.128)에 예군 남려(南閭) 등이 우거(위만조선의 우거왕)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으로 내속하였으므로 (한)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사기 권55 유후세가 제25 장량 전에 창해군(倉海郡) 관련 기록이 있고, 전한서 권6 무제기 제6에는,“元朔元年 秋 東夷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元朔三年 春 罷蒼海郡”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서 권24하 식화지 제4하에는, “彭吳穿濊貊 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東置滄海郡“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

카테고리 없음 2014.02.01

윤여동설 - 고구려 5부의 진짜 위치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5부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고구려에는 5부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후한서 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에는 5부족이 있는데, 소노부(消奴部) · 절로부(絶奴部) · 순노부(順奴部) · 관노부(灌奴部) · 계루부(桂婁部)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진 뒤에는 계루부에서 왕위를 대신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에는 본래 5부족이 있는데, 연노부(涓奴部) · 절로부 · 순노부 · 관노부 · 계루부이다. 원래 연노부(涓奴部)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에서 대신한다................연노부는 본래 나라의 주인이었으므로 비록 지금은 왕이 되지 못하나, 그 적통의 대를 이은 사람은 고추가의 ..

카테고리 없음 2014.01.26

윤여동설 - 고구려의 비류수(沸流水)는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의 홍하(紅河)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비류수(沸流水)는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의 홍하(紅河) - 최초공개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의 위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추모왕(주몽왕) 조를 보면, “졸본천[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러 그 지방의 토양이 비옥하고 산하가 험고함을 보고 곧 도읍을 정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틈이 없어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와서 비류수라는 강변에 허름하게 집을 짓고 살았음을 알게 하는데, 지금까지 기록 속 “비류수(沸流水)”가 지금의 어느 강을 말하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 주몽은 북부여 해모수의 고손자였다. 그 아버지 해불리지가 압록강가에서 어부(하백)의 딸 유화를 겁탈하여 잉태되었고, ..

카테고리 없음 2014.01.19

윤여동설 - 고구려 유리왕이 지은 골천이궁[鶻川離宮]터를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유리왕이 지은 골천이궁[鶻川離宮]터를 찾았다 - 최초주장 [고구려 초기 유리왕이 지은 골천이궁터로서 졸본의 북쪽 공기 맑고 경치좋은 곳에 위치한다. 이러한 인연 때문이었는지 유리왕은 이곳 골천호족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3년(B.C.17) 조를 보면,   “가을 7월 골천(鶻川)에 이궁을 지었다.[秋七月 作離宮於鶻川]”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겨울10월 왕비 송씨가 죽으매 왕이 다시 두 여자를 취하여 계실로 삼았다. 하나는 화희이니 골천(鶻川)사람의 딸이요, 하나는 치희이니 한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질투하여 화목하지 못하므로 왕이 양곡(凉谷)에 동, 서 두 궁을 지어 각각 따로 있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골천(鶻川)이 언급..

카테고리 없음 2014.01.10

윤여동설 - 고구려 시조 추모왕릉(주몽왕릉) 용산(龍山)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시조 추모왕릉(주몽왕릉) 용산(龍山)의 위치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추모왕(주몽왕) 19년(B.C.19) 조를 보면, "가을 9월 왕이 죽으니 이 때에 나이 40세(필자주 : 사실은 61세였다)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 주몽왕(추모왕)은 기원전 79년에 동부여에서 태어나 22세 때인 기원전 58년에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갔고, 그곳에서 졸본부여왕의 둘째공주와 혼인함으로써 부마가 되었다가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다가 기원전 37년에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꿈으로서 고구려의 건국시조가 되었고, 기원전 19년에 죽었으니 61세에 죽은 것이다. 그런데 주몽왕(추모왕)이 동명왕이 세운 졸본부여의 국호를 버리고 “고구려”라고..

카테고리 없음 2014.01.05

윤여동설 - 백제가 요서에 설치했던 진평군 진평현(백제군)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가 요서에 설치했던 진평군 진평현(백제군)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주장 송서 백제국 전에는,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1천여 리에 있다. 그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했는데,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百濟國 本與高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麗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라고 기록되어 있고, 양서에는, "그 나라(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다.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 역시 요서·진평 두 군의 땅을 점거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했다(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卽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가 요서군의 일부와 진평군의 일부..

카테고리 없음 2013.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