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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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환도산(丸都山)은 북경 북쪽 군도산(軍都山)

윤여동설 - 고구려 환도산(丸都山)은 북경 북쪽 군도산(軍都山)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A.D.246) 조를 보면, 가을 8월에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했다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고, 10월에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자 동천왕이 남옥저까지 도망쳐야 했고, 이때 위나라 장수 왕기가 숙신 남쪽 경계까지 동천왕을 뒤쫓아와서 그곳의 돌에 공을 새겨 기념하고, 돌아가면서 또한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이라고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고, 결국 동천왕은 이 전쟁으로 환도성이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할 수 없다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북사 고구려전을 보면, “정시 5년(A.D.244) 유주자사 관구검이 장수와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

카테고리 없음 2013.12.23

윤여동설 - 고구려 마다산(馬多山)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마다산(馬多山)을 찾았다 - 최초공개 한원(翰苑) 고구려 편을 보면, 고구려의 북쪽에 마다산(馬多山)이 있는데, 이 산이 고구려에서 가장 크고, 인삼, 부자, 방풍, 세신이 많이 자라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산이 험해 오직 말을 타야 통행을 할 수 있다고 하였고, 그 산에 남북으로 통행하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의 동쪽에 높은 석벽이 있고, 그 아래에 수천명이 들어갈 수 있는 석실이 있고, 두개의 혈(구멍)이 있는데, 전해지기를 고구려 선조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올 때 처음에는 말을 타지 않고 걸어서 왔는데 이 산에 이르렀을 때 홀현히 말떼가 혈(구멍) 속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마다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마다산 석벽과 석실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찾..

카테고리 없음 2013.12.14

윤여동설 - 전설 속의 나라 고죽국과 연5군의 관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전설 속의 나라 고죽국과 연5군의 관계 - 최초주장 옛 요수가 지금의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 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전국시대 연나라의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2천여리(혹은 1천여리)를 빼앗아 설치했다는 5군 즉 요동군, 요서군, 상곡군, 우북평군, 어양군의 위치가 북경부근으로부터 서남쪽으로 호타하 부근까지였음이 밝혀졌는데, 연5군 지역과 고죽국의 위치가 겹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염철론 권제8 벌공 제45를 보면, “齊桓公越燕 伐山戎 破孤竹 殘令支(제환공이 연나라를 넘어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을 격파하였으며, 영지는 남겨두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사기 권32 제태공세가 제2 환공 23년(B.C.653) 조를 보면, “山戎伐燕 燕告急於齊 齊桓公救燕 遂伐山戎 至于孤竹而還(산..

카테고리 없음 2013.12.07

윤여동설 - 고대의 요동군(遼東郡)은 지금의 북경 부근, 요수는 영정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대의 요동군(遼東郡)은 지금의 북경 부근, 요수는 영정하 - 최초주장 전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를 보면, “요동군은 진나라가 설치하였는데 유주에 속한다. 호수는 55,972호이고, 인구는 272,539명이며, 18개 현을 관할한다. 양평현,신창현,무려현,망평현,방현,후성현,요대현,요양현,험독현,거취현,고현현,안시현,무차현,평곽현,서안평현,문현,번한현,답씨현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지제23 군국5를 보면, “요동군은 낙양동북 3,60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후한서에는 요동군 이외에도 낙랑군은 낙양동북 5,000리에, 현토군은 낙양동북 4,000리에, 요서군은 낙양동북 3,300리에, 상곡군은 낙양동북 3,200리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우북평군은 낙..

카테고리 없음 2013.12.02

윤여동설 - 신라와 말갈의 국경 니하(泥河)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와 말갈의 국경 니하(泥河)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신라의 니하(泥河)는 요녕성 조양시 북표시 동쪽 망우하(牤牛河)]    삼국사기 신라 6대 지마왕 14년(A.D.125) 조를 보면, “봄 정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으로 대부대로 몰려와서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하더니 가을 7월에 또 대령책을 습격하고 니하(泥河)를 넘었다.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청하니 백제가 5명의 장군을 보내 도우매 적병이 소문을 듣고 물러갔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20대 자비왕 11년(A.D.468) 조를 보면,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에 하슬라 백성들로서 15세 이상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니하(泥河)에 성을 쌓았다[니하는 일명 니천..

카테고리 없음 2013.11.16

윤여동설 - 신라 김알지와 김허루갈문왕은 무슨 관계였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 김알지와 김허루갈문왕은 무슨 관계였을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4대 탈해이사금 9년(A.D.65) 조를 보면,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날이 새자 호공을 보내 보았더니 나뭇가지에 조그만 금궤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대로 보고하자 왕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다가 열었더니 어린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시는 것이 아니겠느냐?’하고는 곧 거두어 길렀다. 그가 자라매 총명하고도 지략이 많았으므로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고 그가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

카테고리 없음 2013.10.28

윤여동설 - 백제 무령왕지석 마지막 글자의 의미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무령왕지석 마지막 글자의 의미 - 최초주장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지석]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이 62세로 계묘년(A.D.523)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A.D.525) 8월 12일에 이르러 관위에 어울리는 대묘를 조성하고 안치하였는 바 그 내용은 좌측과 같다. ?( 마지막 이 글자는 아직 해독한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무령왕지석의 맨 마지막에 새겨져 있는 글씨는 과연 무슨 글자인 것이며, 무슨 의미로 지석의 맨 마지막에 새겨 놓았던 것일까? → 屛 이는 “屛(병)”자로서 “황공하옵니다”라는 의미로 보인다. 당시 사람들이 왕이 죽고, 죽은 왕을 땅 속에 묻어야 하고 또 그러한 내용의 지석을 써야 하는 일이 매우 황공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이는 ..

카테고리 없음 2013.10.04

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의 초기강역과 제후국의 위치 확인하기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의 초기강역과 제후국의 위치 확인하기 - 최초공개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를 보면, 고조선의 초기강역 즉 고조선(왕검조선)이 건국된 지 약 10여년 후의 기록에 그 강역에 대하여, “북쪽으로는 대황(大荒)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알유를 거느리고, 남쪽으로는 해대(海岱)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창해(蒼海)에 닿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기록에서 대황이란 커다란 사막지역 또는 큰 황무지라는 의미이고, 알유란 중국의 전설 속 괴물로서 중국의 북쪽 지역에 살았으며, 용의 머리와 호랑이의 발톱을 가지고 있고,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아마 흉노족을 말하는 듯 하고, 해대란 청주지역 즉 지금의 산동반도 부근을 말하는 것이며, 창해란 지금의 발해 요동만 부근, 또..

카테고리 없음 2013.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