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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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논쟁 - 신라 진한 6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는 최씨의 조상인가, 정씨의 조상인가?

윤여동설 - 논쟁 - 신라 진한 6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는 최씨의 조상인가, 정씨의 조상인가? [최씨들이 최근에 세웠다는 돌산고허촌장소벌도리공기적비]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 조를 보면 진한 6촌(진한 6부)에 대하여 “1.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 2.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 3. 자산 진지촌(觜山 珍支村, 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 4.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 5.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6.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으로 기록하고 있고, 고허촌장 소벌공이 혁거세거서간을 양육한 후 신라의 왕위에 추대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 신라 건국시조 혁거세거서간은 동부여 해부루왕의 딸인 사소(파소라고도 한다)공주가 혼전에 어떤 남자와 정을 통하여 임신이 되자 동부여에..

카테고리 없음 2012.07.16

윤여동설 - 백제 온조왕의 고향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 온조왕의 고향을 찾았다 - 최초공개 비류와 온조의 진짜 부모는 누구? 백제의 건국시조 비류왕과 온조왕의 부모에 대한 옛 기록들은 매우 혼란스럽다.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과 졸본부여 둘째공주 사이에서 출생했다는 설, 주몽과 월군여인 사이에서 출생했다는 설,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졸본사람인 연타발의 딸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다는 설, 구태와 공손도 딸의 후예설 등이 있는데, 필자가 연구해 보니 비류와 온조는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의 작은 아들의 아들 즉 동명왕의 손자인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다. 즉 비류와 온조는 졸본부여 동명왕의 증손자였던 것이다.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 | ......................................................

카테고리 없음 2012.07.08

윤여동설 - 백제(대륙백제, 온조백제) 비류왕과 온조왕은 쌍둥이 형제였을 가능성이 많다

윤여동설 - 백제(대륙백제, 온조백제) 비류왕과 온조왕은 쌍둥이 형제였을 가능성      “백제의 건국시조 비류왕과 온조왕이 쌍둥이 형제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확인되지 않은 또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보자.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이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여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일설에는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로서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이다. 우태가 죽은 뒤 (소서노가) 졸본에 홀로 살..

카테고리 없음 2012.07.01

윤여동설 - 요(거란) 5경의 위치 찾기

윤여동설 - 요(거란) 5경의 위치 찾기 요(거란) 5경의 위치에 대한 기록 상경임황부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는 원래 한(漢)나라의 요동군(遼東郡) 서안평(西安平) 땅(?)이다. [필자주 : 상경임황부가 요동군에 속한 현이었다는 것은 오기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나라 왕망은 북안평(北安平)이라 불렀다. .....................(중략)....................... 요 태조 신책 3년(A.D.918)에 그곳에 성을 쌓고 황도(皇都)라고 불렀다. 천현 13년(A.D.938)에 이름을 상경(上京)으로 바꾸었고 부를 임황(臨潢)이라 하였다. 중경대정부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는 우순 때 영주(營州)가 되었고(?), 하나라 때는 기주(..

카테고리 없음 2012.06.25

윤여동설 -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로와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로와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로 - 최초주장 수 양제와 당 태종은 직접 고구려를 침공했던 사람들이다. 군사들의 출발지가 탁군(涿郡)과 정주(定州)로 달랐을 뿐 고구려 요동성(遼東城)을 향하여 진군했던 것도 같고, 진군 도중에 갈석산(碣石山)에 올랐던 것도 같으며, 결국 고구려 침공에 실패했던 것도 같다. 삼국사기 고구려 영양왕 22년(A.D.611)조를 보면, “봄2월에 수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4월에 양제의 행차가 탁군(涿郡 : 지금의 탁주시 부근)의 임삭궁(臨朔宮)에 이르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여들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A.D.645) 조를 보면, “봄 정월에 당 태종이 정주(定州)를 떠나서..

카테고리 없음 2012.06.18

윤여동설 - 고구려 태조대왕 때 쌓은 요서10성의 축성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태조대왕 때 쌓은 요서10성의 축성 위치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2년(A.D.49) 조를 보면,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우북평이라고도 한다),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하였더니 요동태수 채동이 은의와 믿음으로 대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로부터 6년 뒤인 태조대왕 3년(A.D.55) 조를 보면, “봄2월에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 한나라 병사(한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모본왕 때 북평(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했을 때 요동군과 요서군의 일부지역을 후한으로부터 빼앗았음을 알 수 있고, 태조대왕 때 이르러 그곳을 수비하기 위하여 요서지역에 10개의 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물론 이때 태조대왕은..

카테고리 없음 2012.06.10

윤여동설 - 천년의 수수께끼 임유관(臨渝關)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천년의 수수께끼 임유관(臨渝關)을 찾았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온달열전을 보면, “.......이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遼東)을 침략하니 왕(평원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의 들판에서 맞받아 쳐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용감히 싸워 적병 수십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 용감히 싸워 크게 이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평강상호태열제(평원왕)는 담력이 있고 말타고 활쏘는 것을 잘했으니 곧 주몽의 풍모가 있었다. 대덕으로 개원하고 정치를 잘하였다. 대덕18년 병신(A.D.576)에 제(평원왕)는 대장 온달을 보내 갈석산(碣石山), 배찰산(拜察山)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楡林關)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

카테고리 없음 2012.06.04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택(遼澤)”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택(遼澤)”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요택(遼澤)의 위치는 지금까지 의문의 장소였다. 정확한 요택의 위치를 찾지 못해 우리의 역사해석은 한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안시성에서 철군할 때의 기록이 일자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 권198 당기14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 조를 보면, “․(貞觀 十九年 九月) 癸未 敕班师 先拔辽․蓋二州户口渡辽 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 (서기 645년 9월18일 (안시성에서) 경사로 회군할 것을 명하였다. 요주, 개주 두 주의 백성을 먼저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아래에서 시위하고 개선하였다) ․乙酉 至辽东(9월20일 요동에 이르다) ☆ 안시성에서 요동성까지 2일이 걸렸다. ․丙戌 渡..

카테고리 없음 2012.05.28

윤여동설 - 당 태종의 고구려 요동(遼東) 침공로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당 태종의 고구려 요동(遼東) 침공로 - 최초공개 [당 태종이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을 쳤다는 마수산. 산의 형태가 말의 머리모양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당 태종이 서기 645년에 고구려를 침공했던 침공로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었고, 진군 도중에 당 태종이 올랐다는 갈석산의 위치 역시 아직 오리무중이며, 당 태종이 고생하며 지났다는 요택이 어디를 말하는지 분명치 않았으며, 당나라군이 요수를 건너 진을 쳤다는 마수산(말머리산) 역시 아직도 그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당 태종이 군사들을 이끌고 출발한 곳은 정주(定州)였다. 그리하여 반도사관론자들은 당 태종이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정주를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향하여 북경부..

카테고리 없음 2012.05.19

윤여동설 - 주(周)나라의 도읍 빈(豳), 기(岐), 풍(豐), 호(鎬), 낙읍(洛邑)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주(周)나라의 도읍 빈(豳), 기(岐), 풍(豐), 호(鎬), 낙읍(洛邑)의 위치 - 최초공개 주나라의 시조는 후직(后稷)으로서 성은 희(姬)씨라 한다. 본래의 이름은 기(棄)이다. 그는 요임금 때 농업을 관장하는 관리였고, 그 직책은 세습되어 아들, 손자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후직의 증손자인 공유(公劉) 때에 이르러 관직을 잃고 빈(豳)으로 옮겨 살았는데, 공유의 9대손 고공단보(古公亶父) 때에 이르러 융적의 지속적인 침공을 받게 되자 기(岐)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기에 새로 터전을 잡은 고공단보는 매우 정치를 잘하여 백성들은 태평가를 불렀고, 주변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백성들이 점점 모여들게 되어 강성하여 졌고, 그 아들인 계력(季歷) 때에는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정벌하게 되어..

카테고리 없음 2012.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