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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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근초고왕의 아버지 비류왕의 일생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근초고왕의 아버지 비류왕 그는 구수왕의 증손자였다 - 최초공개 지금 역사드라마 “근초고왕”이 방영되고 있어 백제 역사상 가장 넓은 강역을 이루었다는 근초고왕에 대하여 세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부여구(후일의 근초고왕)가 젊은 시절 그 아버지인 비류왕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궁에서 쫓겨 나가 소금장사를 하면서 살다가 후일 백제의 13대 왕위에 올라 고구려 고국원왕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백제의 강역을 중국 요서까지로 넓히는 위대한 왕으로 설정되어 있다. 근초고왕과 그 아버지 비류왕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드라마 내용의 어느 부분은 역사적 사실이고, 어떤 내용은 픽션을 가미했구나 하는 것까지 구분하면서 본다면 재미는 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백제 초기의..

카테고리 없음 2010.11.12

윤여동설 - 정감록에서 800년 도읍지로 지목한 계룡산은 한반도 충남 계룡산을 말하는게 아니다

윤여동설 - 정감록에서 800년 도읍지로 지목한 계룡산은 한반도 충남 계룡산을 말하는게 아니다 [위 : 정감록에서 새로운 800년 도읍지로 지목한 대륙 계룡산과 그 남쪽 평원] [위 : 한반도 계룡산 남쪽 신도안. 나라의 도읍이 들어설 만한 평지 공간이 없는 산악지역이다] 정감록은 한민족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는 예언서인데, 한양 도읍기가 지나면 계룡산 남쪽에 새로운 800년 도읍지가 건설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 정감록에는 또 계룡산 800년 도읍기가 지나면 가야산 1,000년, 전주 600년, 그 후 다시 송악이 도읍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새로운 800년 도읍지는 한반도 계룡산 남쪽에 건설될 것이라고 정감록을 해석했다. 어떤 사람은 신도안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는 지금의 충남..

카테고리 없음 2010.11.08

윤여동설 - 백제의 탄현(炭峴)과 황산(黃山)을 찾았다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탄현(炭峴)과 황산(黃山)을 찾았다 - 최초주장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이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階伯)으로 하여금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가서 신라군과 싸우도록 했는데,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 결국은 패하고 계백이 죽음을 당했다” 위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A.D.660) 조의 황산벌 전투에 관한 기록으로서 이때 신라군은 5만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백제가 멸망한지 1,3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전쟁기록 속에 나타나는 탄현과 황산을 정확히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탄현과 황산을 찾는다고 뛰어들게 되어 각각..

카테고리 없음 2010.11.01

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은 한곳이 아니라 남한성과 북한성이 있었다

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은 한곳이 아니라 남한성과 북한성이 따로 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한성(漢城)”을 “백제의 5백년 도읍지”라 인식하고 있는데, 그것이 과연 역사적 진실인 것일까? 백제의 온조왕은 기원전 18년에 위례성(하남위례성)에 도읍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다가 기원전 5년에 도읍을 한수의 남쪽(필자주 : 한수의 하류로 옮겼다고 했어야 정확한 표현이었다) 남한성으로 옮기게 된다. ☆ 백제 건국설화를 보면, 온조왕은 미추홀로 가서 나라를 세웠던 형인 비류왕이 죽자 그 신하들과 백성들을 십제에 귀속시키고 미추홀의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고 전하는데, 아마 비류왕과 온조왕은 쌍둥이 형제였던 듯 하다. 이때 온조왕이 도읍을 옮기게 된 이유는 그가 전해인 기원전..

카테고리 없음 2010.10.25

윤여동설 - 백제의 마수산(마수성)은 하북성 평천(平泉)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마수산(마수성)은 하북성 평천(平泉) - 최초주장 [마수산(馬首山] : 하북성 평천 부근의 말머리 형상 지형] 당태종 고구려 침공 때 주둔했던 마수산(馬首山)을 찾은 김에 우리의 백제에도 동일한 이름의 마수산(馬首山)이라는 산이 있었으므로 백제의 마수산도 찾아보기로 하자.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8년(B.C.11) 7월 조를 보면, “축마수성(築馬首城)”이라고 하여 이때 마수성이라는 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고, 또 다루왕 3년(A.D.30) 10월 조를 보면, "동부 흘우가 말갈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상으로 말10마리와 벼5백석을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의 마수산이 말갈과의 접경 지역이었음을 ..

카테고리 없음 2010.10.18

윤여동설 - 당 태종 고구려 침공시의 주둔지 마수산(馬首山)을 찾았다

윤여동설 - 당 태종 고구려 침공시의 주둔지 마수산(馬首山 : 말머리산)을 찾았다 [마수산으로 비정되는 곳으로서 말이 구유에 입를 넣고 먹이를 먹고 있는 것 같다. 하필 그곳에 도로가 나고 건물이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서기 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하기 위..

카테고리 없음 2010.10.11

윤여동설 - 경주의 성덕대왕신종은 원래의 종을 축소하여 만든 모사품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경주의 성덕대왕신종은 원래의 종을 축소하여 만든 모사품인가? - 최초주장 경덕왕이 12만근(3만kg)의 황동을 내 놓아 혜공왕 때 완성했다는 성덕대왕신종의 실제 무게는 18,908kg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세간에서 그 종소리가 어린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와 비슷하다하여 에밀레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원래 봉덕사에 안치했다고 하여 봉덕사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탑상 제4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 조에 기록되어 그 전말이 전해졌다. 기록을 보면, “신라 35대 경덕대왕이 천보13년 갑오(A.D.754)에 황룡사종을 주조했는데, 길이는 1장 3촌, 두께는 9촌, 무게는 49만7,581근(124,395kg)이었다. 시주는 효정이왕 삼모부인이..

카테고리 없음 2010.10.04

윤여동설- 정확하게 그린 백제의 왕위계승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정확하게 그린 백제의 왕위계승도 - 최초주장 [무너져 가고 있는 대륙백제가 쌓은 장성의 흔적] [백제 왕위계승도] 장 시조 온조왕 자 ↓ 계 자(실명 :온조왕보다 먼저 죽었다) 승 ↓ 기 2대 다루왕 ↓ 자(실명 : 다루왕보다 먼저 죽었다) ↓ 3대 기루왕 ↓ 자(실명 : 기루왕보다 먼저 죽었다) ↓ 4대 개루왕 ↓ (장자파) (차자파) ................................................I.................................................. ↓ ↓ 5대 초고왕 구태 (仇台) ↓ ↓ 6대 구수왕 자(실명) ↓ ↓ 왕 자(실명 : 구수왕보다 일찍 죽었다) 8대 고이왕 위 .I.............................

카테고리 없음 2010.10.01

윤여동설 - 고구려 민중왕의 능이 조성된 석굴은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민중왕의 능이 조성된 석굴은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하북성 적성현 양전향에 있는 백운산 구련동] [북경 서북쪽 연경 고애거]    민중왕은 고구려 제4대 왕이다.   3대 대무신왕이 서기 44년 10월에 41세의 나이로 죽고, 대무신왕의 아들로서 태자로 봉해져 있던 해우[해애루라고도 한다. 5대 모본왕]가 너무 어려 정사를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태자의 숙부였던 해색주가 대신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곧 민중왕이다.   그 형인 대무신왕이 41세에 죽었으므로 민중왕이 왕위에 오를 때 그의 나이는 약 35-40세 쯤이 되었을 것인데, 재위 5년인 서기 48년에 죽었다.   대무신왕이나 민중왕 모두 40대 초반에 죽었으니 형제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고 만 것이다...

카테고리 없음 2010.09.26

논쟁 - 호두과자와 호도과자 중 어느 것이 옳은 표기인가?

논쟁 - 호두과자와 호도과자 중 어느 것이 옳은 표기인가? [호도(胡桃)] 우리나라 사람 중에 천안 호두과자를 한번이라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겉모양이 마치 호두처럼 생겼고, 속에는 호두살도 조금 들어 있어 특히 따끈따끈할 때 먹으면 달콤하면서도 고소하게 씹히는 맛이 아주 일품으로서 천안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호두과자는 한국인 만이 아니라 세계인이 함께 좋아할 가능성이 많은 식품이라 할 수 있다. 천안시에서는 천안명물 호두과자를 국제화하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충남 천안 부근을 지나다보면 호두과자를 판매한다는 상점들의 간판을 많이 볼 수 있는데, 한결같이 “호두과자”라고 표기하고 있다. (혹시 호도과자라고 표기한 곳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카테고리 없음 2010.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