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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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2000년전 구려(句麗)에 유리로 만든 궁전이 있었다?

윤여동설 - 2000년전 구려(句麗)에 유리로 만든 궁전이 있었다? 한치윤의 해동역사 권제29 궁실지 성궐 편을 보면, “句麗王宮內有水晶城可方一里 天未曉而明如晝 城忽不見月便蝕(梁四公記)”라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의미가 “구려의 왕궁 내에 수정으로 만들어진 성이 있는데, 사방1리쯤 된다. 날..

카테고리 없음 2011.04.01

윤여동설 - 고려 귀주대첩(龜州大捷)의 현장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려 귀주대첩(龜州大捷)의 현장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 - 최초공개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이후 압록강 하류로부터 동쪽으로 화주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서기 1018년 12월 10일(무술일) 거란의 부마 소손녕이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8천3백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안주)에 주둔시켜 거란의 침공을 방어하게 한다.    그리하여 강감찬은 다시 기병 1만2천명을 뽑아 흥화진(興化鎭)에 매복시키고, 또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 물을 가두어 두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물을 터놓아 거란군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복병을..

카테고리 없음 2011.03.25

윤여동설 -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

윤여동설 -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 근구수왕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몇째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 375년 11월에 13대 근초고왕(이름은 부여구였다)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백제 14대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10년인 384년 4월에 죽었는데, 그의 성명은 부여수(扶餘須)였다. 왕비는 아이부인(阿爾夫人)으로서 15대 침류왕을 낳았다. 어느 사람은 삼국사기 근구수왕 조의 “一云諱須(일운휘수)”라는 기록을 보고는 근구수왕의 이름이 “휘수(諱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기록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서 이 의미는 “일설에 이르기를 근구수왕의 이름은 수(須)라고 한다” 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근구수왕의 성씨는 백제왕실의 성씨인 “부여(扶餘)”씨였을 것이고, 이름은 “수(須)”로서 "부여수(扶餘須)"가 근구..

카테고리 없음 2011.03.11

윤여동설 - 고구려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 조를 보면,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27년(A.D.44) 조를 보면,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여 그 땅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드니 살수(薩水)이남 지역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 대무신왕이 최리의 낙랑국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낙랑국 땅을 차지하자 7년 뒤에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옛 낙랑국 땅의 일부인 살수이남 땅을 고구려로부터 다시 탈환하여 낙랑군을 부활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

카테고리 없음 2011.03.06

윤여동설 - 고구려 태조대왕의 동부여 유화태후릉 참배루트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태조대왕의 동부여 유화태후릉 참배루트를 밝힌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6대 태조대왕 69년(A.D.121) 조를 보면,  “겨울 10월 왕이 부여(동부여)에 가서 태후의 사당에 제사지냈다(冬十月 王幸扶餘 祀太后廟)” 라고 기록되어 있고,   “11월 왕이 부여로부터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태후란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왕(추모왕)의 어머니인 유화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직접 동부여까지 가서 유화태후의 능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앞서 주몽이 동부여에서 무슨 큰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잡히면 죽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졸본부여로 급히 도망치게 되는데, 이때 주몽은 어머니인 유화와 임신한 부인 예씨를 동부여에 그대로 남겨..

카테고리 없음 2011.03.01

윤여동설 - 수 양제가 만든 운하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의 위치

윤여동설 - 수 양제가 만든 운하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의 위치 지금 중국에서는 수 양제 때 만들었다는 운하 통제거와 영제거가 지금의 북경에서 항주까지 장장 1,764km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중국의 주장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

카테고리 없음 2011.02.21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의 일식관측지는 북경 연경(延慶)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의 일식관측지는 북경 연경(延慶) 부근 - 최초주장                     [위: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  [조선초에 고구려 석각천문도를 바탕으로 다시 제작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조선 초에 제작된 돌에 새긴 천문도이다.   그런데 이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평양성에 석각천문도가 있었는데 전쟁통에 잃어버렸고 사본만이 전해져 이를 바탕으로 조선초에 새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고구려 평양성에 돌에 새긴 천문도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 고적 조를 보면, “첨성대 유지(遺址)가 평양부 남쪽 3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고구려에서 석각천문도를 바로 ..

카테고리 없음 2011.02.12

윤여동설 - 호태왕비의 원래 위치는 하북성 승덕시 부근인가?

윤여동설 - 호태왕비의 원래 위치는 하북성 승덕시 부근인가? 고구려의 도읍 졸본, 국내성, 환도성은 지금의 북경 부근이고, 평양성(平壤城), 황성, 장안성은 한반도의 북한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을 고구려의 국내성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그곳의 태왕릉이라는 고총 역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능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19대 왕으로서 16대 고국원왕의 손자였다. 고구려의 도읍 이전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되어 2대 유리왕 22년(A.D.3)에 국내(국내위나암, 국내성)로 도읍을 옮겼다가 10대 산상왕 13년(A.D.209)에 다시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데 ..

카테고리 없음 2011.02.06

윤여동설 - 동부여의 진짜 위치와 왕위계승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동부여의 진짜 위치와 왕위계승 - 최초공개 후한서 부여국전을 보면,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여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하였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부여전에도 거의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후한서에서 말하는 부여국은 시기적으로 동부여를 말하는 것이다. [후한서와 삼국지가 말해주는 동부여의 위치] 약수 선비 동부여 읍루 현토군 고구려 따라서 후한서와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부여의 위치를 찾으면 동부여의 위치를 찾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부여는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던 것일까? 삼국유사 동부여 조를 보면, “북부여의 왕인 해부루의 대신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카테고리 없음 2011.01.29

윤여동설 - 옥저(북옥저,남옥저,동옥저)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옥저(북옥저,남옥저,동옥저)의 위치 - 최초공개 옥저는 셋이 있었는데, 북옥저와 남옥저 그리고 동옥저였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이 옥저의 위치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후한서 동옥저전을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까지이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맥과 접했다” “(한)무제가 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땅으로 현토군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 “또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국경의 북쪽(필자주 ; 원본은 남쪽으로 되어 있으나 오기이므로 필자가 바로 잡았다)으로 읍루와 접..

카테고리 없음 2011.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