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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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무왕이 어릴 적 살았던 마룡지를 찾았다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이 어릴 적 살았던 마룡지(馬龍池)를 찾았다 백제 30대 무왕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무왕의 이름은 장이니 법왕의 아들이다. 풍채가 영특하고 체격이 컸으며 그 의지와 기상이 호걸스러웠다. 법왕이 왕위에 오른 다음해에 죽어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유사 기이 제2 무왕 조에는,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서쪽의 오기?)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어릴 때의 이름은 서동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항상 마를 캐다 팔아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 무왕의 신분에 대해서는 두 기록이 각각 다른데 필자는 무왕이..

카테고리 없음 2010.09.19

윤여동설 - 백제 무령왕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무령왕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 최초주장 우리나라 사람치고 백제 25대 무령왕(서기 461년 6월1일에 출생하여 523년 5월7일에 사망함)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충남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도 구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인 곤지와 곤지의 집안 형수였던 개로왕의 왕비 사이의 불륜 관계로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삼국사기를 보고 무령왕을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아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 동성왕과 무령왕은 부자간이 아니라 이복 형제 사이로서 동성왕이 형이고 무령왕이 동생이다. 그러나 일본서기 웅략천황 2년(A.D.458) 조를 보면, "가을 7월 백제의 지진원(池津媛)은 천황이 장차 부르려고 하였는데 석천순(石川楯)과 간통하였다...

카테고리 없음 2010.09.16

윤여동설 - 백제 무광왕(武廣王)과 모도왕(牟都王)은 어디에서 왕위에 올랐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무광왕(武廣王)과 모도왕(牟都王)은 반도백제의 왕들이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왕들은 대륙백제의 왕들이었다 - 최초주장      백제 역사는 아직까지도 풀지 못한 비밀들이 많이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가 한반도에서 건국되었다고 인식한다.   그리고는 첫 도읍 위례성이 천안 직산이다 아니다 풍납토성이다 하면서 한반도에서 백제의 초기 도읍지를 찾고 있고,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를 충남 부여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는 대륙백제로서 한반도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 중국 하북성에서 건국된 나라였다.   그리고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 절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남제..

카테고리 없음 2010.09.13

윤여동설 - 백제의 위례성 - 하남위례성 - 남한성 - 한성 - 북한성의 관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위례성 - 하남위례성 - 남한성 - 한성 - 북한성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한다 - 최초주장 [백제 한산 부아악 추정지] 삼국사기 기록 중 백제의 위례성, 하남위례성, 남한성, 한성, 북한성의 관계에 관한 기록들은 매우 혼란스럽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백제의 도읍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사람마다 주장들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弥鄒忽)로 돌아가서 살게 되었고,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서 보좌역을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였는데, 이때는 전한 성제 홍가 3년(B.C.18)이었다”고 기록함으로서 비류가 세운 나라의 도읍은 미추홀이었고, 온조십제의 최초 ..

카테고리 없음 2010.09.06

윤여동설 - 우수주(우두주)는 한반도 강원도 춘천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우수주(우두주)는 한반도 강원도 춘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지리지 삭주(朔州) 조를 보면, “삭주는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동남쪽과 예의 서쪽이 옛날 맥의 지역’이라 하였으니 대개 지금 신라의 북쪽삭주(盖今新羅北朔州)인 듯하다. 선덕왕(선덕여왕) 6년인 당 정관 11년에 우수주(牛首州)로 만들어 군주를 두었고[문무왕 13년인 당 함형4년에 수약주를 설치하였다고도 한다],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춘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춘천도호부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맥국인데 신라의 선덕왕(선덕여왕) 6년에 우수주(우두주라고도 한다)로 만들고 군주를 배치했다. 문무왕 13년에는 수약주(오근내라고도 하고 수차약이라고도 한다)라고 불렀고..

카테고리 없음 2010.08.30

윤여동설 - 우공갈석(禹貢碣石)은 북경 서남쪽 지금의 보정시 낭아산(狼牙山)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대의 우공갈석(禹貢碣石)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낭아산(狼牙山) - 최초공개           우공갈석은 상산(항산) 구문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중국 역사상 9명의 황제들이 올랐다는 유명한 산이다.  진(秦) 시황이 올랐고,   진 2세 호해가 올랐다고 하며,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기 전인 기원전 110년에 올랐고,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 즉 위 무제가 올라 “관창해(觀滄海)”라는 시를 읊었다 하고,   진(晉) 선제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창려를 거쳐 갈석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진시황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북위 문성제,   북제 문선제가 올랐고,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올랐다고 하고,   당 태종 역시 고구려를 침공할 때 올라 “춘..

카테고리 없음 2010.08.22

윤여동설 - 한(漢) 고조 유방과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관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漢) 고조 유방과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관계 - 최초주장 지금 중국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漢)나라가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도움을 받아 건국된 나라였다고 하면 중국 사람들에게는 자존심 상할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전한서 권1상 고제기 제1상 4년(B.C.203) 조를 보면, “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 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貉在東北方三韓之屬皆貉類也” 라는 안사고의 주가 달려 있다. 이의 뜻은 “기원전 203년에 북맥과 연나라가 용감한 기병을 보내와 한나라를 도왔다"라는 뜻이고, “맥은 동북방에 있는 삼한의 지속으로 모두 맥류이다”라는 뜻이다. ☆ 중국 사람들은 주변의 민족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나누어 불렀..

카테고리 없음 2010.08.16

윤여동설 - 북송의 휘종과 흠종이 잡혀와 살다 죽은 태백산(장백산) 동쪽 오국성(五國城)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북송의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잡혀와 살다 죽은 태백산(장백산) 동쪽 오국성(五國城)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북송의 휘종과 흠종은 1126년 도읍인 개봉을 함락당하고 포로로 잡혀 금나라로 끌려가 억류생활을 하다가 죽은 비운의 황제들이다. 나라를 망쳤으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죄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역사에서는 이를 정강의 변이라 부른다. 이때 금나라는 북송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황후, 황태자, 친왕, 공주, 황족 등 무려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북쪽으로 끌고 와 태백산(장백산) 동쪽 오국성(五國城)에 억류하고는, 휘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 흠종에게는 혼덕공(昏德公)이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이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죽게 된다. 금나라는 후일 휘종이 죽은..

카테고리 없음 2010.08.09

윤여동설 - 내몽골 파림좌기는 요(거란) 상경임황부가 아니라 발해의 상경용천부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내몽골 파림좌기는 요(거란) 상경임황부가 아니라 발해의 상경용천부이다 - 최초주장 (위 : 파림좌기의 발해 상경용천부 터로서 중국에서는 이곳을 요 상경임황부 터라고 하고 있는데 거짓말이다)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라는 의미는 요수(遼水)를 중심으로 그 동쪽과 서쪽이라는 의미일 것인데, 거란족이 도읍을 임황(상경임황부가 된다)에 정하고는 국호를 “요(遼)”라고 하게 된다. 국호를 새로 정할 때 아무 인연도 없고, 역사, 지리적 관계도 없이 아무렇게나 정했을 리는 만무하고 거란족과 “요(遼)”가 무언가 특별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국호를 “요(遼)”라고 정했을 것인데, 사서들은 거란족이 "요택(遼澤)"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조선(이씨조선을 말함)의 경우에도 처음에 국호를 정할 때 ..

카테고리 없음 2010.08.02

윤여동설 - 송막기문을 지은 홍호의 유배지 냉산(冷山)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송막기문을 지은 홍호의 유배지 냉산(冷山)을 찾았다 - 최초공개 고려사절요 예종 10년(A.D.1115) 조를 보면, 『생여진의 완안아골타가 황제라 칭하고 이름을 민이라 고쳤으며,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 성곽이 없고, 산과 들에 흩어져 거주하며 문자가 없어 끈을 매어 약속한다. 그 지방에 돼지, 양, 소, 말이 많은데, 말은 준마가 많다. 사람들은 사납고 날래며 어릴 때부터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기 때문에 장성하여 활을 쏘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말을 달리고 전투를 익혀 강병이 되는데, 여러 부락이 제각각 우두머리라 하여 통일이 되지 못하였다. 그 지방이 서쪽은 거란이요, 남쪽은 우리나라(고려) 땅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

카테고리 없음 2010.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