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전체 글 1063

윤여동설 - 송서 왜국전 속 의문의 기록 왜5왕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송서 왜국전 속 의문의 기록 왜5왕 찬(讚) , 진(珍) , 제(濟) , 흥(興) , 무(武) - 최초주장    송서 권97열전 제57이만동이 왜국전을 보면,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의문의 기록이 들어있다.   기록을 보면,   왜국은 고(구)려 동남 대해 중에 있는데,   고조 영초2년(A.D.421)에  왜왕 찬(讚)이 만리 밖에서 조공을 보내와 그 성의를 가상히 여겨 작위를 주었고,   태조 원가 2년(A.D.425)에 진(珍)이 왕위에 올라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는데, 이때 자칭 "사지절도독 왜(倭)·백제(百濟)·신라(新羅)·임나(任那)·진한(秦韓)·모한(慕韓)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왜국왕"이라고 하며 정식으로 인정해 달라고 하자 송 태조는 "안동장군왜국왕"의..

카테고리 없음 2008.04.18

윤여동설 - 신라의 경순왕은 어느 길을 따라 개경으로 갔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 금성과 고려 개경의 위치 - 최초주장 고려사절요를 보면, 『태조 을미 18년(A.D.935) 10월 임술일(초하루)에 신라왕 김부가 시랑 김봉휴를 보내 들어와서 조회하겠다고 청하므로 왕(태조 왕건)이 섭시중 왕철과 시랑 한헌옹 등을 보내 회보하였다. 11월 갑오일(3일)에 신라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신라도읍 서라벌)를 출발하니 사대부와 서민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와 보마가 30여 리에 이어지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서 막혔으며, 구경꾼들이 쭉 둘러서 있었다. 길가에 있는 주와 현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대하였고, 왕이 사람을 보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계묘일(12일)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에 들어오니 왕이 의장을 갖추고 교외에 나가서 맞이하며 위로하고, 동궁과 여러 재신에게..

카테고리 없음 2008.04.11

윤여동설 - 한반도 북한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북한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아니다 - 최초주장 피서산장 옥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조를 보면, 『서기 666년 겨울12월 (당)고종이 이세적으로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를 삼고, 사열소상 백안륙과 학처준으로 이를 보좌케 하고, 방동선과 설필하력으로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를 삼고 기타 수륙군 모든 부대의 총관들과 전량사들인 두의적, 독고경운, 곽대봉 등은 모두 이세적의 지휘를 받게 하고 하북 여러 주들의 조세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어 군용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26년 정묘(A.D.667) 가을9월 이세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설필하력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앞서 이세적이 요수(遼水)를 건너와서 모든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이기 때문에 이..

카테고리 없음 2008.04.09

윤여동설 - 백제 방어의 요충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방어의 요충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의 기록인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조를 보면, 『당 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대장군 소정방으로 신구도행군대총관을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과 우무위장군 풍사귀와 좌효위장군 방효공 등과 더불어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와서 치게 하고 겸하여 신라왕 김춘추로서 우이도행군총관을 삼아 자기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 현 산동반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나라(신라)의 서쪽 덕물도에 이르니 신라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어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왕(백제 의자왕)이 이 소문을 듣고 여러 신하..

카테고리 없음 2008.04.07

윤여동설 - 요동군, 요서군, 상곡군, 우북평군, 어양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전한서지리지가 말해주는 상곡군과 어양군, 우북평군의 위치 - 최초공개 고조선 때 연나라 진개의 침공을 받고 서쪽 변경 1천여리의 땅을 빼앗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연나라에서는 그 땅에 요동군, 요서군, 어양군, 우북평군, 상곡군을 설치하고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연장성이라 합니다)을 쌓아 그 땅을 영구히 연나라 땅으로 만들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 고구려는 그 땅을 탈환하려 하였고, 중국 세력들은 그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펼치게 되고, 한 때는 백제도 뛰어들어 요서지역까지 진출하여 북위와 전쟁을 하여 대승하기도 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5대 모본왕 2년(A.D.49) 조를 보면,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우북평이라..

카테고리 없음 2008.04.07

윤여동설 - 보덕왕 안승이 살았던 금마저(金馬渚)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보덕왕 안승이 살았던 금마저(金馬渚)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문무왕 10년 서기 670년 6월 고구려 수림성 사람 모잠 대형이 668년에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신라로 오다가 고구려 귀족인 안승을 만나 백제의 옛 도읍인 한성에서 안승을 왕위에 올린 후 신라에 망명을 요청해 오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안승의 신분에 대하여 고구려의 대신 연정토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문무왕이 안승에게 내린 책명문에 "공의 태조 중모왕은 덕을 북산에 쌓고, 공을 남쪽 바다에 세워 위풍이 청구에 떨쳤고, 어진 교화는 현토를 덮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안승의 신분은 고구려의 왕족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고, 한성이란 한반도의 서울을 말하..

카테고리 없음 2008.04.03

윤여동설 - 한반도 김제 벽골제는 신라가 쌓은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전북 김제 벽골제는 신라가 쌓은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16대 흘해이사금 21년(A.D.330) 조를 보면, "벽골지(碧骨池)를 처음 만들었는데 그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원성왕 6년(A.D.790) 조를 보면, "봄 정월 벽골제(벽골지의 뚝)를 증축하는데, 전주 등 일곱 주의 사람을 징발하여 공사를 일으켰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이 기록을 한반도 전북 김제 부량면에 있는 옛 저수지 뚝에 비정해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그 뚝을 김제벽골제라 부르며, 이 저수지 뚝이 신라 흘해이사금 때 쌓은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기 위해서는 신라 초기인 서기 330년에 전북 김제 지역이 신라 땅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한반도..

카테고리 없음 2008.04.02

윤여동설 - 고려의 강동 6주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의 강동 6주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서기 993년 고려 성종 12년에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으로서 고려를 침공한다.   앞서 왕건이 거란에서 보낸 낙타를 만부교에서 굶어 죽게 했고, 그 후 다시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 국교 맺기를 요청했으나 고려는 아예 상대를 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고려가 거란을 신의 없고 믿을 수 없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란이 침공해오자 고려에서는 박양유를 상군사로 삼고, 서희를 중군사로,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북서쪽 국경에 주둔하고 거란을 방어하게 하고, 왕 성종도 개경에서 서경으로 왔다가 안북부로 나아가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거란이 봉산군을 쳐서 고려의 선봉군사인 윤서안 등이 사로잡히게 된다.   성종이 서희..

카테고리 없음 2008.04.01

윤여동설 - 당나라가 신라에게 준 패강이남(패수이남) 땅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당나라가 신라에게 준 패강이남(패수이남) 땅은 한반도 대동강 남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없애고 삼국을 통일했다하여 그 이후 시기를 통일신라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신라가 옛 고구려 땅을 모두 차지하지 못하고 패수 이남의 극히 일부분만을 차지했기 때문에 삼국통일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으므로 달리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신라가 패수 이북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34년(A.D.735) 조의,"정월 김의충을 당나라에 보내 신년을 축하했다. 2월에 부사 김영이 당나라에서 죽으니 광록소경을 추증했다. 의충이 돌아올 때 황제(당 현종)가 조칙으로 패강 남쪽 땅을 (신라에게) 주었다" ..

카테고리 없음 2008.03.31

윤여동설 - 삼국사기는 왜 최리를 낙랑왕이라 기록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사기는 왜 최리를 낙랑왕이라 기록했을까? - 최초주장 [청나라 때의 피서산장(열하행궁) 전경 그림인데 성 내부의 면적이 170만평이나 되는 곳으로서 이곳이 바로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옛날 고조선의 단군들과 고구려의 왕들은 이렇듯 제왕이 살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멋진 곳에서 살았다.] 우리 삼국 역사를 논할 때 항상 먼저 언급되어야 하는 것이 곧 "낙랑(樂浪)"인데, 이는 낙랑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는 우리의 고대사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낙랑의 어원은 잘 알 수 없으나 "즐거울락(樂) 물결랑(浪)" 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위치가 바다(혹은 큰 강)를 끼고 있는 곳으로서 큰 파도가 치는 것이 장관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이게 되었을..

카테고리 없음 2008.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