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전체 글 1063

윤여동설 - 대방은 북경 동쪽 준화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대방은 북경 동쪽 준화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우리 삼한 삼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특히 백제 왕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많았던 대방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 그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대방(帶方)이 한반도 내에 위치했었을 것으로 역사를 인식한다. 이는 삼국유사에 남대방의 위치를 "지금의 남원부"라고 주를 달아 놓았고, 또 조선시대의 역사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 조에도 "본래 백제 고룡군인데 후한 건안 중에 대방군이 되었고, 조위 때 남대방군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록들을 한반도의 전북 남원에 그대로 적용하여 남원 부근이 대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삼국지 한(韓) 전에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카테고리 없음 2008.06.22

윤여동설 - 삼한(三韓)은 지금의 북경 동쪽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한(三韓)은 지금의 북경 동쪽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변진)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 우리는 삼한이 사방 1천리쯤이 되는 한반도 남부를 나누어 서울, 경기, 충청, 전라도가 마한이었다고 하고, 경북일원을 진한이었다고 하며, 경남 일원이 변한이었다고 인식한다. 그런데 삼국지 한(韓)전을 보면, "조선후 준이 왕을 참칭하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고, 그의 좌우 근신과 궁인들을 이끌고 도망하여 바다를 건너 한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했다. 그의 후손은 끊어졌으나 지금 한인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있다. 한나라 때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기원전 194년 준왕이 위만의 침공을 받고, ..

카테고리 없음 2008.06.19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을까? - 최초공개   [위 : 산의 굴곡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축성된 승덕시 피서산장 성벽]  『조선왕 만(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연(燕)나라가 강성할 때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귀속시키고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었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 시켰을 때 조선은 요동(遼東)의 외곽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흥기하자 그곳이 멀고 수비하기가 어렵다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정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위만)도 1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상투(추결)를 틀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달아나 패수를 건너 망명하여 진나라의 빈땅인 상하..

카테고리 없음 2008.06.17

윤여동설 - "왕검성(王儉城)" 그곳은 과연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왕검성(王儉城)" 그곳은 과연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우리 역사 5천년의 중심지 왕검성의 위치   왕검성(王險城)이란 고조선 도읍의 이름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의 확실한 위치를 잃어버렸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든 이 왕검성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가 이 왕검성의 위치를 꼭 찾아야 하는 것은 이곳이 바로 우리 한민족 5천년 역사의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고, 우리의 고대 강역을 밝힐 수 있는 중심점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은 크게 왕검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눌 수 있는데, 왕검조선은 기원전 2333년 건국되어 기원전 1122년까지 47명의 단군들이 1212년 간 다스린 나라였고, ..

카테고리 없음 2008.06.15

윤여동설 -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왜곡하지 않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왜곡하지 않았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 등 고려의 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1145년에 완성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정사이다. 그런데 이 삼국사기의 내용에 대하여 고려시대 사람들은 아주 잘 만들어진 역사서로 인식하여 송나라에도 보낼 정도로 자신 있는 사서였는데, 조선시대로 들어오면 삼국사기는 졸지에 잘못된 역사서의 대표격으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는 고려시대 사람들이 삼국사기를 잘 정리된 역사서로 보았고, 조선시대 사람들이 삼국사기를 잘못된 역사서로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으나 우리는 지금까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신라의 건국지를 경주라 하고, 백제의 건국지를 서울부근이라 하며, 고구려의 건국지를 압록강 북쪽이라 하며..

카테고리 없음 2008.06.08

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 최초주장 우리나라 사람 중에 일연의 삼국유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삼국유사가 쓰여진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저자인 일연이 죽은 때가 84세 때인 1289년이었으므로 그 이전 언젠가 삼국유사를 집필했을 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삼국이전의 우리 상고사에 대하여 다루지 않고, 오직 삼국시대 만을 다룬데 비해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조선, 왕검조선을 시작으로, 부여, 삼한, 한사군, 삼국과 가야, 후백제와 발해까지를 언급하고 있고, 불교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 훨씬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카테고리 없음 2008.06.05

윤여동설 - 삼국 최초의 역사서는 유기, 국사, 서기가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 최초의 역사서는 유기·국사·서기가 아니다 - 최초주장 고구려 최초의 역사서는 "유기(留記)"가 아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11년(A.D.600) 조를 보면, "왕이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옛 역사(古史)를 요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국초에 어느 사람이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여 기사 1백권을 써서 유기(留記)라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요약, 수정하였다. (詔 太學博士 李文眞 約古史 爲新集五券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이 기록을 보고는 유기가 고구려 최초의 역사서였다고 이해하지만 필자는 이 유기라는 역사서는 원래 고구려의 역사서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국초에 어느 사람이 유기를 썼다고..

카테고리 없음 2008.06.02

윤여동오락 - 나는 무슨 띠와 궁합이 맞을까?

윤여동오락 - 나는 무슨 띠와 궁합이 맞을까? 결혼을 앞 둔 우리나라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면서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 남녀간의 궁합이다. 그리하여 결혼을 할 대상이 생기면 그 부모는 두 사람의 사주를 가지고 궁합을 맞추어 보게 되는데, 이는 이 둘이 결혼을 하게되면 아들 딸 잘 낳고 이혼없이 평생 잘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때문에 미리 예측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식이 잘 살아주기를 바라는 부모님들의 자식사랑의 한 발로일 것이고, 겉모습만 보아서는 결혼예정상대자의 성장배경이나 사고방식, 성격, 취미, 건강, 성적인 능력 등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 더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연구해 본 끝에 아주 먼 옛날 어느 사람이 궁합보는 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게 되었을 ..

카테고리 없음 2008.06.01

윤여동설 - 새로 그려보는 백제 초기의 왕위 계승도

윤여동설 - 새로 그려보는 백제초기의 왕위 계승도 시조 온조왕 ↓자 ?(실명) : 아버지인 온조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2대 다루왕 ↓자 ?(실명) : 아버지인 다루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3대 기루왕 ↓자 ?(실명) : 아버지인 기루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4대 개루왕 ↓자 5대 초고왕 ↓자 6대 구수왕 ↓자 ?(실명) : 아버지인 구수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7대 사반왕 : 약 10세쯤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8대 고이왕에게 왕위를 찬탈 당했다. ☆ 백제 초기의 왕위 계승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되었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그 진실을 찾아야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데, 비록 필자의 추정이 진실까지는 못된다 하더라도 그 진실에 한발자국 다가갈 수는 있을 것이다. ..

카테고리 없음 2008.05.29

역사추리 - 비류백제의 태자는 어디로 갔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비류백제의 태자는 어디로 갔을까? - 최초주장 [무너진 백제장성] 우리는 지금 백제의 건국시조를 "온조왕(溫祚王)"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원래 "백제(百濟)라는 나라의 건국시조는 '비류(沸流)'라고 기록하고 있고, 온조왕은 '십제(十濟)'의 건국시조였는데, 후일 형인 비류왕이 죽자 온조왕이 비류백제와 온조십제를 통합한 후 국호를 새롭게 "백제(百濟)"라고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온조왕은 자신이 세운 나라인 십제의 국호를 버리고 형이 세운 나라인 백제를 국호로 삼았다는 말이 되므로 엄격한 의미에서는 백제의 건국시조는 비류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고, 온조왕은 백제의 2대왕으로 기록해야 마땅할 것이나 삼국사기는 비류백제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는 있지만 단순한 일화정도로 취..

카테고리 없음 2008.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