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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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시사 - 멜라민이 안들어간 음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제 어떤 음식을 먹어야 안전한가? - 멜라민 분유파동에 붙여 공기는 매연에 오염된 지 이미 오래고, 물도 사먹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이제는 먹는 음식마저도 믿고 사먹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지금 온 세계가 중국산 멜라민 분유파동으로 연일 시끌시끌하다. 이 세상에서 가공식품으로 판매되는 음식 중에 우유가 들어가는 품목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할텐데 그 많은 제품 중 어떤 것이 불량 우유를 사용했는지, 어떤 제품이 정상적인 우유를 사용했는지 일반인으로서는 구분할 방법이 없고, 육류도 육안으로 보아서는 병에 걸린 쇠고기인지, 닭고기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생선도 인체에 해로운 물질을 먹여 키운다고 하니 세상에 무엇을 믿고 먹어야 하는지 걱정이 앞서고, 앞으로 시중에 판매되는 식품 중에 멜라민 분유..

카테고리 없음 2008.09.29

윤여동설 - 고구려 해명태자가 죽어야 했던 진짜 이유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해명태자가 죽어야 했던 진짜 이유 - 최초주장 연속극 "바람의 나라"를 보면 비록 재미를 위해서라지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많은 내용이 삽입되어 있어 역사적 사실만을 밝히고자 하는 역사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감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사극을 모두 원전대로만 그릴 수는 없는 일이니 스스로 역사적 사실을 알고 픽션과 논픽션을 구별하며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구려 유리왕에게는 원래 다섯명의 친아들과 한명의 양아들이 있었다. 도절, 해명, 무휼, 해색주, 여진 등은 유리왕의 친아들들이고, 재사라는 또 한 명의 양아들이 있었다. 도절은 요절했고, 해명은 유리왕의 명을 받고 목숨을 끊어야 했으며, 무휼은 3대 대무신왕이고, 해색주는 4대 민중왕이며, 여진은 어렸을 때 비류수..

카테고리 없음 2008.09.27

윤여동설 - 근초고왕이 옮긴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은 진황도 도산남쪽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근초고왕이 옮긴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은 진황도 도산남쪽 - 최초공개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A.D.371) 조를 보면,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침공해 왔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패하가에 군사를 숨겨놓고 기다리다가 그들이 도착하자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힘을 다하여 항전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으니,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왔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移都漢山)"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백제가 도읍을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을 알게 한다. ☆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백제가 신미년(A.D.371)에 도읍을 "한산(漢山)"이 아닌 "북한..

카테고리 없음 2008.09.26

윤여동설 - 백제의 남한성은 하북성 당산 천안시 건창영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의 남한성은 하북성 당산 천안시 건창영부근 - 최초공개     사실 백제 최초의 도읍, 더 엄격히 말한다면 온조십제 최초의 도읍이 위례성(慰禮城)이냐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냐 또는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이 동일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고, 한산에 남한산과 북한산이 따로 존재했느냐, 한성이 두개로서 남한성과 북한성으로 나누어져 있었느냐 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논란거리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서 보좌역을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는데, 이때는 전한 성제 홍가 3년(B.C.18)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기원전 6년 조에는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제 나가서 순행하다가 한수(漢水..

카테고리 없음 2008.09.22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과 미추홀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과 미추홀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기원전 42년 기묘년에 소서노는 어린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졸본의 압록강 나루에서 배에 몸을 실었다. 이때 소서노의 나이 25세였고, 비류는 4-5세정도, 온조는 2-3세 정도였다.[필자주 : 혹은 비류와 온조가 쌍둥이 형제였을 가능성도 있다] 원래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호족 연타발의 딸로서 졸본부여 왕족인 우태에게 시집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둘째 아들 온조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인 우태가 갑자기 죽어 젊은 나이에 아들 둘 딸린 과부가 되어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졸본에서 주몽왕과 재혼한 후 자신이 우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졸본부여의 태자로 봉하려 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졸본을 떠나 압록강을 타고 내..

카테고리 없음 2008.09.19

윤여동설 - 백제시조 온조왕은 주몽의 아들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시조 온조왕은 주몽의 아들이 아니다 - 최초주장 백제 시조 온조왕이 주몽의 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이다. 기록을 보면, "백제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필자주 : 동부여의 오기이다)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부여왕(필자주 : 졸본부여왕이다)이 아들은 없고 다만 딸 삼 형제가 있었다. 왕이 주몽을 만나보고 그가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로서 아내를 삼게 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부여왕(졸본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그의 왕위를 이었다. 주몽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둘째 아들은 온조이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카테고리 없음 2008.09.17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 그 이후 - 민중왕과 모본왕    대무신왕이 서기 44년 10월에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자 고구려에서는 다음 왕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대신들의 고민이 깊어지게 된다.    원칙적으로는 대무신왕의 태자로 봉해져 있는 해우(해애루)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순리겠으나 나이가 10여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가 후한의 광무제에게 살수이남 땅을 다시 빼앗긴 비상시국이었기 때문에 호족들은 결국 12-13세 짜리 어린 왕으로서는 현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죽은 대무신왕의 동생인 해색주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렸는데, 이가 바로 4대 민중왕이다.   그런데 민중왕은 특별한 업적은 남기지 못한 채 재위 5년째인 서기 48년에 젊은 나이로 죽고 마는데, 죽을 ..

카테고리 없음 2008.09.12

윤여동설 - 고구려 3대 대무신왕 무휼의 일생 (2)

윤여동설 - 고구려 3대 대무신왕 무휼의 일생(2)     유리왕이 서기 18년 10월에 죽자 태자인 15세의 무휼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가 곧 전쟁의 신 대무신왕이다.   대무신왕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 다음해인 서기 19년 정월에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해 오는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때 백제에는 가뭄이 심해 패수와 대수 사이에 사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고, 또 그 다음해인 서기 20년 3월에는 죽은 아버지 유리왕의 사당을 세운다. ☆ 삼국사기에는 이때 동명왕묘를 세웠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9월에는 골구천에서 사냥을 하다가 신마를 잡아 거루라고 이름 붙였고, 10월에는 동부여왕 대소가 머리는 하나요, 몸뚱이가 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는데, 대소왕은 이를 ..

카테고리 없음 2008.09.10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 무휼의 일생(1)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 무휼의 일생(1)     고구려 3대왕인 대무신왕의 성은 해씨요, 이름은 무휼이다.  서기 4년에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위나암에서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작은 딸이다.  11세에 태자로 봉해졌고, 15세의 나이로 유리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3대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27년째인 서기 44년 10월에 죽어 대수촌 벌판에 묻혔다.    앞서 대무신왕의 아버지 유리왕은 기원전 19년 4월에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 와서 고구려의 태자로 봉해졌고, 그 해 9월 고구려 건국 시조 추모왕(주몽왕)이 죽자 뒤를 이어 고구려의 2대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유리왕의 나이는 40세였고 아직 혼인을 하지 못한 노총각이었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른 다음 ..

카테고리 없음 2008.09.08

윤여동설 -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와 낙랑왕 최리의 딸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 [호동왕자와 낙랑공주가 밤을 지새웠을 낙랑국왕성 전경도] 우리는 지금 고구려 대무신왕의 맏아들인 호동왕자와 낙랑왕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를 매우 안타깝게 ..

카테고리 없음 2008.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