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졸본 18

윤여동설 - 고구려의 비류수(沸流水)는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의 홍하(紅河)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비류수(沸流水)는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의 홍하(紅河) - 최초공개     [북부여의 도읍 흘승골성으로 비정되는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의 위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추모왕(주몽왕) 조를 보면,   “졸본천[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러 그 지방의 토양이 비옥하고 산하가 험고함을 보고 곧 도읍을 정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틈이 없어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와서 비류수라는 강변에 허름하게 집을 짓고 살았음을 알게 하는데, 지금까지 기록 속 “비류수(沸流水)”가 지금의 어느 강을 말하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 주몽은 북부여 해모수의 고손자였다.   그 아버지 해불리지가..

카테고리 없음 2014.01.19

윤여동설 - 고구려 유리왕이 지은 골천이궁[鶻川離宮]터를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유리왕이 지은 골천이궁[鶻川離宮]터를 찾았다 - 최초주장 [고구려 초기 유리왕이 지은 골천이궁터로서 졸본의 북쪽 공기 맑고 경치좋은 곳에 위치한다. 이러한 인연 때문이었는지 유리왕은 이곳 골천호족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3년(B.C.17) 조를 보면,   “가을 7월 골천(鶻川)에 이궁을 지었다.[秋七月 作離宮於鶻川]”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겨울10월 왕비 송씨가 죽으매 왕이 다시 두 여자를 취하여 계실로 삼았다. 하나는 화희이니 골천(鶻川)사람의 딸이요, 하나는 치희이니 한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질투하여 화목하지 못하므로 왕이 양곡(凉谷)에 동, 서 두 궁을 지어 각각 따로 있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골천(鶻川)이 언급..

카테고리 없음 2014.01.10

윤여동설 - 고구려 시조 추모왕릉(주몽왕릉) 용산(龍山)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시조 추모왕릉(주몽왕릉) 용산(龍山)의 위치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추모왕(주몽왕) 19년(B.C.19) 조를 보면,   "가을 9월 왕이 죽으니 이 때에 나이 40세(필자주 : 사실은 61세였다)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 주몽왕(추모왕)은 기원전 79년에 동부여에서 태어나 22세 때인 기원전 58년에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갔고, 그곳에서 졸본부여왕의 둘째공주와 혼인함으로써 부마가 되었다가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다가 기원전 37년에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꿈으로서 고구려의 건국시조가 되었고, 기원전 19년에 죽었으니 61세에 죽은 것이다.  그런데 주몽왕(추모왕)이 동명왕이 세운 졸본부여의 국호를 버리..

카테고리 없음 2014.01.05

윤여동설 - 백제 온조왕의 고향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 온조왕의 고향을 찾았다 - 최초공개 비류와 온조의 진짜 부모는 누구? 백제의 건국시조 비류왕과 온조왕의 부모에 대한 옛 기록들은 매우 혼란스럽다.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과 졸본부여 둘째공주 사이에서 출생했다는 설, 주몽과 월군여인 사이에서 출생했다는 설,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졸본사람인 연타발의 딸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다는 설, 구태와 공손도 딸의 후예설 등이 있는데, 필자가 연구해 보니 비류와 온조는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의 작은 아들의 아들 즉 동명왕의 손자인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다. 즉 비류와 온조는 졸본부여 동명왕의 증손자였던 것이다.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 | ......................................................

카테고리 없음 2012.07.08

윤여동설 - 황룡국(黃龍國)은 고구려의 졸본,국내성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황룡국(黃龍國)은 고구려의 졸본,국내성 부근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유리왕 20년(A.D.1) 봄정월 태자 도절이 죽었다. 22년(A.D.3) 겨울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23년(A.D.4) 봄2월에 왕의 아들 해명을 세워 태자를 삼고 전 국내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7년(A.D.8) 봄 정월에 왕의 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 남아 있었는데 힘이 세고 용감하였다. 황룡국(黃龍國)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궁을 선물하였더니 해명이 그 사신 앞에서 활을 잡아당겨 꺾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단단하지 못하다’ 하니 황룡왕이 무안해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황룡왕에게 말하기를 ‘해명은 자식으로서..

카테고리 없음 2011.09.16

윤여동설 - 송양의 비류국(沸流國)은 졸본 서쪽에 위치했었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송양의 비류국(沸流國)은 졸본 서쪽에 위치했었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추모왕 원년(B.C.37) 왕이 비류수 중류에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상류에 사람이 사는 것을 알고 사냥을 하면서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왕 송양이 나와보고 말하기를 ‘내가 궁벽한 바다 모퉁이에 외따로 살기 때문에 아직 군자를 만나보지 못했는데, 오늘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전연 알지 못하겠소’ 하였다. 주몽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자손으로서 아무 아무 곳에 와서 도읍을 정했소’했다.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 대째 왕이 되어 온 터에 땅이 적어 두 임금은 용납할 수 없고, 그대는 도읍을 정한지도 얼마되지 않..

카테고리 없음 2011.09.09

윤여동설 - 졸본(홀본)은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졸본(홀본)은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 최초주장 고구려의 첫 도읍 졸본(홀본)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졸본(홀본)을 찾으면 고구려 초기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많은 실제의 장소들을 찾을 수 있게 되는데, 앞으로 그 위치들이 하나씩 공개될 것입니다. 사실 이는 내용 하나하나가 모두 박사학위논문 쓸 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내용들인데, 역사연구자들이 그 진실을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우리 역사연구를 위해 아낌없이 공개할 예정입니다. 역사를 연구하시는 분들께서 본 내용을 인용하실 땐 “윤여동설에 의하면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이 졸본(홀본)이라 한다”고 반드시 표기해 주시기 바라고,..

카테고리 없음 2011.09.02

윤여동설 - 소서노와 비류 온조의 남하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소서노와 비류 온조의 남하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유리를 말함)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드디어 오간, 마려 등 열명의 신하들을 데리고 남쪽지방으로 떠나니 백성들 중에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이리하여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서 살만한 곳을 살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기이 제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조에는, “고전기(古典記)에 이르기를, ”동명왕의 세째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유년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년에 도읍을 한산(漢山:지금의 광..

카테고리 없음 2011.06.24

윤여동설 - 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홀본)으로 간 남하로 찾기

윤여동설 - 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홀본)으로 간 남하로 찾기 [지금 중국에서는 원 상도유지(원 상도성터)라 하고 있는데 이곳은 옛 동부여의 도읍 부여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은 22세 때에 동부여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자 그곳에서 남쪽으로 도망쳐 엄호수(호태왕비문에는 엄리대수라고 하였다)를 건너 졸본(홀본)으로 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 왕의 둘째공주와 혼인을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그후 주몽이 부여(동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 2년 봄2월에 남쪽으로 도망쳐 졸본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위서 고구려전에는 “주몽은 오인, 오위 등 두 사람과 함께 부여(동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라고 하였다. 두 기록이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친 방향을..

카테고리 없음 2011.06.17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의 일식관측지는 북경 연경(延慶)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의 일식관측지는 북경 연경(延慶) 부근 - 최초주장                     [위: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  [조선초에 고구려 석각천문도를 바탕으로 다시 제작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조선 초에 제작된 돌에 새긴 천문도이다.   그런데 이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평양성에 석각천문도가 있었는데 전쟁통에 잃어버렸고 사본만이 전해져 이를 바탕으로 조선초에 새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고구려 평양성에 돌에 새긴 천문도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 고적 조를 보면, “첨성대 유지(遺址)가 평양부 남쪽 3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고구려에서 석각천문도를 바로 ..

카테고리 없음 2011.02.12

윤여동설 - 고구려 졸본, 국내성과 작위 속 요동군개국공의 의미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졸본, 국내성과 고구려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 속 “요동군개국공”의 의미 - 최초주장 고구려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를 보면 한결같이 “요동군개국공”이란 문구가 들어가 있다. 북위에서 장수왕에게 보낸 작위는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고, 문자왕에게 보낸 작위는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으며, 안장왕에게 보낸 작위는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으며, 안원왕에게 보낸 작위는 “사지절 산기상시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으며, 북제에서 양원왕에게 보낸 작위는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고구려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에는 대개 “..

카테고리 없음 2011.01.12

윤여동설 - 주몽과 유리가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친 진짜 이유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주몽과 유리가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친 진짜 이유 - 최초주장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은 동부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유화부인이고, 아버지는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증손자인 해불리지(필자주 : 혹시 해불리지의 아들의 오기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이다. 해불리지가 압록강가를 지나다가 하백(어부)의 딸인 유화를 겁탈하여 임신시키게 되고, 유화의 아버지인 하백은 시집도 안간 처녀가 임신했다 하여 자기 집에서 내쫓아버린다. 그리하여 유화는 동부여로 가서 주몽을 낳게되고 그곳에서 살게된다. 세월은 흘러 주몽은 자라 동부여 왕궁의 말지기가 되고, 예씨라는 여인과 혼인을 하였는데, 예씨가 임신 중에 있을 때 갑자기 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동..

카테고리 없음 2008.08.31

윤여동설 - 고구려의 세 번째 도읍 환도성(丸都城)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의 세 번째 도읍 환도성(丸都城)의 위치 - 최초주장 고구려 10대 산상왕은 서기198년에 이르러 환도성(丸都城)을 쌓았다. 이는 이때 후한이 말기 현상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산상왕은 상황에 따라서는 요동 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이 환도성을 활용할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후한의 멸망이 거의 기정 사실화되자 209년 10월에 이르러 환도성(丸都城)으로 옮겨살며 요동 쪽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 우리는 지금 집안 북쪽에 위치한 산성자산성을 환도산성일 것이라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이었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중국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이었다.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카테고리 없음 2008.07.27

윤여동설 -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의 진짜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의 진짜 위치 - 최초주장 [이곳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이 진짜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이다] 많은 사람들은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이 지금의 한반도 압록강 북쪽 요녕성 환인(桓仁)이고, 그곳의 험준한 산꼭대기에 있는 오녀산산성을 졸본성일 것이라 믿고 있다. 학자들이 환인의 오녀산산성이 고구려의 첫 도읍 졸본성일 것이라고 추정하게 된 것은, 환인의 동남쪽이며 호태왕비(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가 서있는 길림성 집안(集安)을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국내위나암)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집안의 서북쪽 멀지 않은 환인의 험준한 오녀산 정상에 오래된 산성이 있자 그곳을 졸본성일 것이라고 추정했던 것인데, 사실 그곳 오녀산산성에서 고구려의 ..

카테고리 없음 2008.07.22

윤여동설 - 고구려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윤여동설 - 고구려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우리는 지금 고구려가 28명의 왕들이 왕위를 이었던 것은 알고 있으나 확실한 고구려 왕릉은 한곳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 평양의 고구려 왕릉을 추모왕릉(주몽왕릉)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북한 학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고, 집안의 태왕릉을 광개토왕릉, 장군총을 장수왕릉이라 하고 있으나 이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보장왕의 능은 당나라 장안에 조성했다고 했으므로 실제 고구려 강역 내에는 27명의 왕릉만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요녕성 환인을 졸본이라 했고, 길림성 집안을 국내성이라 했으며, 북한 평양을 평양성, 황성, 장안성이라 ..

카테고리 없음 2008.05.19

윤여동설 - 잃어버린 나라 정안국(定安國)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잃어버린 나라 정안국(定安國)의 위치 - 최초공개     송사 정안국전(定安國傳)을 보면,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족인데, (발해가) 거란에게 격파 당하자 그 추수가 남은 무리들을 규합해서 (발해의) 서쪽 변방에 웅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면서 자칭 정안국(定安國)이라 했다.[필자주 : 정안국은 발해의 서경압록부를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였는데, 발해의 서경압록부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의 고북수진을 말하는 것이다]   개보(開寶) 3년(A.D.970)에 정안국왕 열만화(烈萬華)가 여진이 파견한 사신을 통하여 표와 방물을 바쳤다.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A.D.976∼983)에 (송) 태종이 원대한 계획을 세워 거란을 토벌하려고 하면서 정안국에 조서를 내려 기각의 형세를 ..

카테고리 없음 2007.10.10

윤여동설 - 고구려 900년 존속설과 부흥운동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900년 존속설과 부흥운동 - 최초주장 우리 민족 역사에서 가장 광대한 강역을 일구었던 고구려의 멸망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우리가 지금도 매우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런데 당나라 사람인 가언충이라는 사람은 고구려비기라는 예언서에 고구려가 건국된 지 900년 만에 80대장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다고 하고, 고구려가 멸망한 서기 668년이 건국된 지 꼭 900년이 되는 해였다고도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상한 것은 어떻게 서기 668년이 고구려가 건국된 지 900년이 되는 해라고 말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사 상식으로는 ..

카테고리 없음 2007.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