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하북성 승덕시 19

윤여동설 - 고려 귀주대첩(龜州大捷)의 현장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려 귀주대첩(龜州大捷)의 현장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 - 최초공개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이후 압록강 하류로부터 동쪽으로 화주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서기 1018년 12월 10일(무술일) 거란의 부마 소손녕이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8천3백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안주)에 주둔시켜 거란의 침공을 방어하게 한다.    그리하여 강감찬은 다시 기병 1만2천명을 뽑아 흥화진(興化鎭)에 매복시키고, 또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 물을 가두어 두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물을 터놓아 거란군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복병을..

카테고리 없음 2011.03.25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의 일식관측지는 북경 연경(延慶)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의 일식관측지는 북경 연경(延慶) 부근 - 최초주장                     [위: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  [조선초에 고구려 석각천문도를 바탕으로 다시 제작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조선 초에 제작된 돌에 새긴 천문도이다.   그런데 이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평양성에 석각천문도가 있었는데 전쟁통에 잃어버렸고 사본만이 전해져 이를 바탕으로 조선초에 새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고구려 평양성에 돌에 새긴 천문도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 고적 조를 보면, “첨성대 유지(遺址)가 평양부 남쪽 3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고구려에서 석각천문도를 바로 ..

카테고리 없음 2011.02.12

윤여동설 -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은 발해 북쪽 지금의 중국 하북성 관성만족자치현(寬城滿族自治縣)이 확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은 발해 북쪽 지금의 중국 하북성 관성만족자치현(寬城滿族自治縣)이 확실 - 최초주장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가 있다고 보여진다.즉, 현재로부터 근세, 고대,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과 상고로부터 고대, 근세, 현재로 내려오는 방법이다. 우리가 지금 한반도 대한민국에 살고 있으니 그 바로 앞 왕조인 조선이 한반도에, 또 그 앞 왕조인 고려 역시 한반도에, 후삼국도 한반도에, 삼국과 가야, 삼한과 위만조선, 고조선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존속했다고 인식하는 논리가 역사를 현재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고찰하는 방법인데, 강단사학은 이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그런데 재야사학은 역사란 사건의 발생순서에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라..

카테고리 없음 2010.02.02

윤여동설 -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 - 최초공개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과연 지금의 어디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주장이 있어왔다. 지금의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조선시대부터의 주장으로부터 압록강 북쪽 요양 또는 요하서쪽 조양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필자의 주장 등이 있는데, 이처럼 주장들이 많다는 것은 아직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정확히 찾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 만약 고구려의 평양성을 정확히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 고대역사의 거의 전부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고조선의 왕검성이었기 때문에 고조선의 중심지를 알 수 있게 되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를 찾을 수..

카테고리 없음 2009.05.25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남한이 이었다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남한이 이었다    우리의 옛 역사는 환인시대, 환웅시대를 지나며 홍산문화(요하문명)를 꽃피웠고, 고조선에 이르러 청동기문화를, 다시 한과 위만조선, 부여시대에 이르러 철기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부여는 다시 고구려가 되고, 고구려는 한사군 중 임둔군, 낙랑군, 구현토군(낙랑동부도위)과 요동군, 대방군을 흡수함으로써 대제국이 되었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발해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되고, 발해는 다시 요·금·원·청·중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위만조선은 다시 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한사군이 되었다가 고구려에 복속되고,  한은 다시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누어지게 되고, 마한에서 백제가, 진한에서 신라가, 변한에서 가야가 건국되었다가 통일신라가 되..

카테고리 없음 2009.05.14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대무신왕은 고구려의 3대왕으로서 2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유리왕의 장자 즉 다물후 송양의 큰딸이 유리왕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 도절은 일찍 죽었고, 유리왕의 계비 화희가 낳은 둘째아들 해명은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로 도읍을 옮기려 할 때 그를 반대하다가 유리왕으로부터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죽었다. 그리하여 유리왕이 다물후 송양의 작은 딸을 다시 왕비로 맞아들여 낳은 아들이 바로 대무신왕 무휼이었다. 무휼(대무신왕)은 자라 1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본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또 갈사왕의 손녀를 둘째 왕비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호동왕자였다. 이때까지도 원비였던 모본호족의 딸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아들을 낳게된다. ..

카테고리 없음 2009.04.21

윤여동설 - 국궁 쏘는 법이 잘못 전해졌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국궁 쏘는 법이 잘못 전해졌다 - 최초주장             태초에 인간은 돌을 던지거나 몽둥이로 짐승을 때려잡았을 것이고, 올가미로 잡거나 함정에 빠뜨려 잡았을 것이며 또는 긴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찔러 짐승들을 사냥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빠른 짐승이나 높은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를 사냥하기 위해 활을 만들게 되었을 것이고, 이윽고 전쟁에도 활용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진서 숙신씨 전을 보면, 석자 다섯치의 단궁(檀弓)과 화살촉을 돌로 만든 호시가 있었다고 하고, 주 무왕 때 숙신씨가 호시와 석노를 바쳤다고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단궁은 이미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후한서 읍루전을 보면 읍루 사람들이 활을 아주 잘 쏘아서 사람..

카테고리 없음 2009.04.16

윤여동설 - 고구려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고구려와 낙랑의 접촉 기록은 3대 대무신왕 15년(A.D.32) 4월 조에, 낙랑왕 최리가 언급되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면서 시작되는데, 사실은 서기 30년에 이미 낙랑동부도위 땅을 고구려가 빼앗았던 듯하다. 그리고 대무신왕 20년(A.D.37) 조에,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다시 27년(A.D.44) 조에, "가을 9월 한나라(후한)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록의 의미를 지금까지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낙랑..

카테고리 없음 2009.02.18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공개 원봉 2년(B.C.109) 한나라는 섭하를 보내어 (조선의) 우거를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수긍하지 않고,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올 때 국경인 패수(필자 주 : 이때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국경이 패수일 수는 없고 살수이어야 맞다. 만약 패수일 경우 패수 동쪽에 바로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사실이 이러했다면 위만조선은 도읍을 동쪽으로 멀리 옮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위만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왕검성에 도읍하고 있었다)에 이르자 사람을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장을 죽이고 즉시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는 그것을 잘한 것으로 여겨 나..

카테고리 없음 2008.12.05

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주장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경에는 무엽산이라 했고, 또는 백악이라고도 하는데 백주에 있었다)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했는데, 고(요임금)와 같은 시대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은) 당고(당요) 즉위 50년 경인(당요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사실이 아닐 것이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고 조선(朝鮮)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도 한다)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했다. 그 나라는 1,500년 간 존..

카테고리 없음 2008.11.26

윤여동설 - 고구려 장안성(長安城, 장안궁) 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장안성(長安城, 장안궁)의 위치 - 최초주장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황성으로부터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25대인 평원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는 또 다시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기게 된다.  삼국사기 평원왕 28년(A.D.586) 조를 보면, "移都長安城(장안성으로 도읍을 이사했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때 장안성으로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옮긴 427년부터 586년까지 160년간 평양성에 도읍한 후 이때 다시 장안성으로 옮겼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평양성과 장안성은 바로 이웃해 있었다고 보여지므로 평원왕은 같은 평양시내에 또 하나의 왕궁인 장안성(장안궁)을 짓고 그곳으로 옮겨 살았을 것이다.     하여튼 이때의 국제정세는 ..

카테고리 없음 2008.08.04

윤여동설 - "왕검성(王儉城)" 그곳은 과연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왕검성(王儉城)" 그곳은 과연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우리 역사 5천년의 중심지 왕검성의 위치   왕검성(王險城)이란 고조선의 두번째 도읍의 이름이다.  첫도읍은 우수하지원의 아사달, 세번째 도읍은 백악산의 아사달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고조선의 도읍들의 위치를 잃어버렸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든 고조선의 도읍들과 특히 이 왕검성을 꼭 찾아내야만 한다.   우리가 이 왕검성의 위치를 꼭 찾아야 하는 것은 이곳이 바로 우리 한민족 5천년 역사의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고, 고구려의 평양성, 고려의 서경으로 이어져 우리의 고대 강역을 밝힐 수 있는 중심점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은 크게 왕검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카테고리 없음 2008.06.15

윤여동설 - 고구려의 황성(黃城)과 장안성(長安城)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황성(黃城)과 장안성(長安城)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부근의 지형도인데, 이 부근이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 황성, 장안성 그리고 고려의 서경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중심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 북경 동쪽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이었고, 난하가 옛 패수이다.   백제는 대륙인 발해 북쪽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에서 13대 근초고왕과 12대 계왕의 아들이었던 무광왕이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패한 무광왕이 서기 365년경 한반도로 건너와 지모밀지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반도백제)를 건국함으로써 한반도에 백제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고,   대륙백제는 근초고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

카테고리 없음 2008.02.03

윤여동설 - 고려 남경(한양)의 위치 찾기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 남경(한양)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 고려 남경 : 고려 남경의 궁궐은 면악(面嶽)을 뒤로 하고, 동남 방향(임좌병향)으로 건축되었다고 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태봉왕 궁예를 몰아내고 서기 918년 6월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 하고는 919년 정월 송악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개경이라 하게 되는데, 개경은 지금의 황해도 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사절요에는 왕건에 대하여,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눈은) 용안과 같이 반짝이고, 턱이 풍만하며 이마가 넓었다. 기개와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컸으며, 너그럽고 후하여 세상을 구제할 만한 도량이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서기 ..

카테고리 없음 2007.11.05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비밀을 밝혀줄 고려도경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우리 역사의 비밀을 밝혀줄 고려도경 - 최초공개 [이글은 윤여동 밝힘 "고려와 조선 역사의 특급비밀" 책에서 발췌한 것임] 송나라 휘종 때 사람인 서긍이 서기 1123년 사신 일행으로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서 쓴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의 위치에 대하여, “고려는 남쪽은 요해, 서쪽은 요수까지이고, 북쪽(사실은 서북쪽)은 거란 옛 땅, 동쪽(사실은 동북쪽)은 금나라와 접했다. 그리고 일본, 유구, 담라, 흑수, 모인 등의 나라와 개의 이빨과 같이 서로 맞물려 있다. 신라와 백제가 자신들의 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병합이 되었으니 현재의 나주와 광주도가 여기에 해당된다. 고려는 우리 송나라 수도(당시 송나라의 도읍은 개봉이었다)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도에서 육로를 거치..

카테고리 없음 2007.10.25

윤여동설 - 백제의 22첨로는 어디를 말하는가?

윤여동설 - 백제의 22첨로(檐魯)는 어디를 말하는가?    우리가 "담로"라고 읽고 있는 글자는 나무목변(木)에 "이를 첨(詹)" 자로서 집의 처마라는 의미의 "처마첨(檐)"자이지 담자가 아니다. 따라서 "첨로"라고 고쳐 읽는 것이 옳다.   처음에 어느 학자가 글자형태가 비슷한 처마첨(檐)자와 멜담(擔)자를 혼동하여 첨로를 담로라고 잘못 읽었고, 그후 어느 역사학자도 옥편을 찾아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앵무새 마냥  계속해 담로라고 되뇌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지금 당장 옥편을 찾아 확인해 본다면 필자의 주장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양서 백제 전을 보면,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檐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치성을 고마라 부르고, 읍을 첨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

카테고리 없음 2007.10.13

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고구려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고구려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청나라 때의 여름궁전인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피서산장)의 정문인 여정문]    지금 압록강 너머 집안(輯安:集安)에는 호태왕비가 서 있고, 왕릉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고분들과 그 집안 부근에는 돌을 쌓아 만든 적석분들이 즐비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그곳을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國內城)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국내성이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대 유리왕 22년(A.D.3) 조에,  "겨울 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라는 기록과   16대 고국원왕 12년(A.D.342) 조의 "봄 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라는 기록에 따라 지금의 집안을 국내성이라 추정한 것 ..

카테고리 없음 2007.10.09

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을 찾았다 - 최초주장

하가점 선사유적지 내몽골 적봉 홍산 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을 찾았다 한 민족 마음의 고향이며, 우리 역사의 중심지인 왕검성(王儉城, 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은 과연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이 왕검성을 확실하게 찾지 못한 채 조선 시대에 이르러 역사를 착각한 일부 사람들이 한반도 북한 평양을 왕검성이라 비정해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왜곡되고 축소된 역사가 사실인 것처럼 전해진 안..

카테고리 없음 2007.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