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윤여동설 909

윤여동설 - 고구려의 도읍이전과 요수, 압록강, 살수, 패수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도읍이전과 요수, 압록강, 살수, 패수의 위치 - 최초공개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이고,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은 북경 서북쪽 적성 후성진이며, 국내성은 북경 북북서쪽 연경 영녕진(영녕고성)이고, 환도성(안시성)은 북경 북쪽 회유의 발해진이며, 평양성은 북경 동북쪽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이다. 요수는 북경 서쪽 영정하이고, 압록강은 북경 동북쪽 백하(밀운수고)이며, 살수는 북경 동북쪽 고북구를 통과하는 조하이고, 패수는 평양성의 서쪽과 남쪽을 지나는 난하이다. ☆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조를 보면, “고구려가 처음에는 중국 북쪽 땅에서 살았으나 점점 패수 옆으로 옮겼다(高句麗始居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側)”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가 졸본에서 건..

카테고리 없음 2019.07.12

윤여동설 - 세 옥저(沃沮)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세 옥저(沃沮)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역사서에 나타나는 옥저(沃沮)는 셋이다. 북옥저(北沃沮)가 있었고, 남옥저(南沃沮)가 있었고, 동옥저(東沃沮)가 있었다. 후한서를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까지이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동부여), 남쪽은 예(濊), 맥(貊)과 접했다. 그 땅이 방 천리의 절반쯤 된다.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있어 오곡이 잘 자라 밭에 씨를 뿌리면 농사가 잘된다.............. 또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국경의 북쪽(필자주 : 원문은 국경의 남쪽으로 되어 있는데, 오기가 확실하므로 필자가 고쳤다)으로 ..

카테고리 없음 2019.07.05

윤여동설 - 고구려 천리장성과 고려 천리장성의 위치비교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천리장성과 고려 천리장성의 위치비교 - 최초공개 고구려 천리장성 구당서 고구려전 정관5년(A.D.631) 조를 보면, "건무(영류왕의 이름)는 그 나라가 침입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쪽 부여성으로부터 서남쪽 바다에 이르기까지 1천여 리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류왕 14년(A.D.631) 조를 보면, "봄2월 왕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그 성이 동북쪽은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필자주 : 서남쪽의 오기이다)으로 바다(해)까지 닿았는데 무려 16년 만에 준공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위 : 내몽골 오란찰포 서남쪽 대해(岱海) 부근의 장성흔적 : 고구려 천리장성의 서남쪽 끝 부분으..

카테고리 없음 2019.06.28

윤여동설 - 중국도(中國圖) 속 발해 북쪽 “려성(驪城)”은 고려 천리장성(千里長城)이고, 장백산(長白山)은 지금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중국도(中國圖) 속 발해 북쪽 “려성(驪城)”은 고려 천리장성(千里長城)이고, 장백산(長白山)은 지금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이다 - 최초주장 고려(高麗)는 원래 위 중국도(中國圖) 속 “長白山(장백산), “驪城(려성)” 부근인 발해 북서쪽에 위치했었다. 장백산은 본래의 태백산(太白山)을 여진족(숙신, 읍루, 말갈)은 도태산(徒太山), 장백산(長白山)이라 불렀던 것이고, 한민족은 불함산(不咸山), 태백산(太白山, 太伯山), 백산(白山) 등으로 불러오다가, 고려 때부터는 백두산(白頭山)이라 바꾸어 불렀다. 본래의 태백산이 여진족의 남쪽, 한민족의 북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두 민족이 공동의 성산(聖山)으로 받들게 된 것이다. 지금의 북경 동북쪽 하북성과 내몽골의 경계를 이루는 칠로도산산맥 중 최고..

카테고리 없음 2019.06.15

윤여동설 - 기자묘(箕子墓)가 있다는 평양성 북쪽 토산(兎山)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기자묘(箕子墓)가 있다는 평양성 북쪽 토산(兎山)을 찾았다 - 최초공개 기자묘(箕子墓)는 고려시대부터 평양성 북쪽 토산(兎山 : 토끼산)에 있다고 전해져 왔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평양성을 지금의 북한 평양이라 착각하고 있으나, 사실 고려로부터..

카테고리 없음 2019.06.08

윤여동설 - 지금의 중국 동북평원(東北平原)이 옛날에는 말갈, 동옥저, 예(동예)의 동쪽 대해(大海)였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지금의 중국 동북평원(東北平原)이 옛날에는 말갈, 동옥저, 예(동예)의 동쪽 대해(大海)였다 - 최초주장 후한서 읍루전 읍루는 옛 숙신국이다. 부여의 동북쪽 1천여리에 있는데, 동쪽은 대해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에 접했으며, 북쪽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후한서 동옥저전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까지이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 맥과 접했다. 후한서 예전 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 예(동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 땅이었다. 삼국지 읍루전 읍루는 부여의 동북쪽 1천여리에 있다.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는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지 못..

카테고리 없음 2019.05.31

윤여동설 - 죽령 서북쪽 500리 땅은 죽령(竹嶺)과 철령(鐵嶺) 사이의 땅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죽령 서북쪽 500리 땅은 죽령(竹嶺)과 철령(鐵嶺) 사이의 땅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조를 보면,   “11년임인(A.D.642) 가을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 지방의 40여개 성을 쳐서 빼앗아 갔다.   8월에 또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党項城)을 빼앗아 당 나라로 가는 길을 끊으려고 도모하므로 왕이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어 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보고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을 쳐서 함락시키니 도독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 용석 등이 이 싸움에서 죽었다.   겨울에 왕이 백제를 쳐서 대야성 전투의 보복을 하고자 즉시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에 대야성이 패하자 도독 품석의 아..

카테고리 없음 2019.05.26

윤여동설 - 고구려 태조대왕의 아버지 재사(再思)의 신분에 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태조대왕의 아버지 재사(再思)의 신분에 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고구려 태조대왕의 아버지 재사(再思)는 아직까지 의문의 인물이었다. 그의 신분에 대하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유리왕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고구려는 건국시조 추모왕(주몽왕)으로부터 5대 모본왕까지는 해(解)씨였고, 6대 태조대왕으로부터 그 이후 고구려왕들의 성씨는 모두 고(高)씨로 나타난다. 고구려의 왕위는 해씨와 고씨 두 성씨로 이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고씨인 6대 태조대왕 고궁(高宮)의 아버지 재사의 성씨 역시 고씨였을 것이므로, 고재사(高再思)가 해씨인 2대 유리왕의 친아들일 수는 없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조에, “태조대왕[국조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궁이요, 아명은 어수이니 유리왕의..

카테고리 없음 2019.05.19

윤여동설 - 잃어버린 현토성(玄菟城)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잃어버린 현토성(玄菟城)을 찾았다 - 최초공개    [장가구시 회안성진 : 규모 가로세로 각 약 1.5km     좌표 동경 114도28분01초 북위 40도27분48초]                                        [위 : 무너진 현토성 성벽]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설치했던 한사군은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현토군(玄菟郡)이었다.   그 중 현토군(玄菟郡)은 처음에는 기원전 107년에 옥저 땅에 설치되었으나 기원전 75년에 이르러 그 위치를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 옮긴 현토군이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낙양 동북 4천리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현토군으로서 바로 이 현..

카테고리 없음 2019.05.07

윤여동설 - 조선 영조 때 이인좌의 난과 분무공신(奮武功臣)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조선 영조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과 분무공신(奮武功臣) - 최초공개 [조선 영조 어진] 1728년(영조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으로서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경종이 세자 때부터 질환이 심했으므로, 숙종은 세자의 왕위계승을 우려해 이이명(李頤命)에게 연잉군(延礽君 : 뒤의 英祖)을 은밀히 부탁하는 정유독대(丁酉獨對 ; 1717년 숙종과 이이명 두 사람만의 만남)를 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세자청정을 할 때도 정사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재위 중에도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노론측은 경종의 무자다병(無子多病)을 이유로 연잉군의 세제책..

카테고리 없음 2019.04.17

윤여동설 - 천하전여총도(天下全與總圖) 속에 식인국(食人國)이 표기되어 있었다

윤여동설 - 천하전여총도(天下全與總圖) 속에 식인국(食人國)이 표기되어 있었다 고지도인 천하전여총도(天下全與總圖)는 명 영락 16년인 1418년에 그려진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필자주 : 識貢圖는 職貢圖의 오기일 것임]를 보고 청 건륭 28년 계미년(1763년)에 막이동(莫易仝)이 모사했다는 세계지도이다. 명나라 초인 1418년에 이렇듯 정확한 세계지도가 그려질 수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1418년이라면 우리의 세종대왕께서 즉위한 해이기도 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지도 속에 "식인국(食人國)"이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도의 서북쪽 귀퉁이에 "凡未加紅圈者皆原圖所未命名者(붉은색 테두리가 되어 있는 것은 원도인 천하제번직공도에 표기된 것이고, 그 밖의 것은 모사할 때 써 넣은..

카테고리 없음 2019.04.12

윤여동설 - 무광왕(武廣王)이 세운 반도백제와 남제왕 70세 때인 519년 기해년에 지은 익산 미륵사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무광왕(武廣王)이 세운 반도백제와 남제왕 70세 때인 519년 기해년에 지은 익산 미륵사지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관세음응험기에,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정사(절)를 새로 지었다(百濟 武廣王 遷都 枳慕密地 新營精舍)"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 무광왕의 존재에 대하여는 알게 되었으나 그 무광왕의 신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전해진 기록이 없어 과연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연구해 보니 무광왕(武廣王)은 대륙백제 제12대 계왕의 아들로서 대륙에서 20여 년간 13대 근초고왕과 왕위다툼을 하다가 패하자 한반도로 도망쳐 백제(반도백제)를 다시 세우고 지모밀지에 도읍한 후 왕위에 오른 인물 즉 반도백제의 건국시조였다.  [대륙백제][장자파]           ..

카테고리 없음 2019.04.05

윤여동설 - 단군왕검의 황후 하백녀(河伯女)의 고향 비서갑(斐西岬)은 과연 지금의 어디일까?

윤여동설 - 단군왕검의 황후 하백녀(河伯女)의 고향 비서갑(斐西岬)은 과연 지금의 어디일까? 고조선의 건국시조 단군왕검은 비서갑(斐西岬)에 사는 하백(河伯)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즉 고조선(왕검조선)의 초대 황후가 곧 하백의 딸이었다는 말이다. [단군왕검의 왕후가 되었던 비서갑 하백녀의 모습일까?] 이암(李嵒)의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보면, “무진년 제요도당(요 임금) 때에 왕검이 단국(檀國 : 환웅국)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 : 아사달 부근의 태백산의 오기일 것이다)의 단목지허(檀木之墟 : 신단수터 즉 단목이 있던 터)에 이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의 아들로 삼게 되었다..... 비서갑(斐西岬)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아내로 삼아 양잠을 관장하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

카테고리 없음 2019.03.29

윤여동설 - 천부인 세 개(天符印 三箇)의 진짜 의미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천부인 세 개(天符印 三箇)의 진짜 의미 - 최초주장 삼국유사 고조선 왕검조선 조를 보면,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 서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는데,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품고 인간세상을 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할 만 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환웅에게 주어 인간 세계를 다스리게 했다. 이에 환웅이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 太白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기록 속에서 환웅을 서자(庶子)라고 표현했는데, 이를 서민(庶民)으로 본다면 환웅은 그 신분이 ..

카테고리 없음 2019.03.25

윤여동설 - 졸본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卒本 : 홀본)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졸본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卒本 : 홀본)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최초공개     졸본[卒本 : 忽本(홀본)이라고도 한다)은 동명왕(東明王)이 세운 졸본부여의 건국지이기도 하고, 주몽이 세운 고구려의 건국지이기도 한 곳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졸본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있었을 뿐 사실 그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고 있었는데, 필자가 지금 북경의 북쪽에 위치한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이 바로 졸본임을 밝혀 냈다.   지금 후성진은 그 북쪽에 후성적벽(后城赤壁) 또는 적수애(滴水崖)라고 부르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산이 있고, 공기 맑고, 풍광 또한 아름다워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있는데, 그곳의 지세를 보면..

카테고리 없음 2019.03.24

윤여동설 - 원(元) 세조 쿠빌라이칸의 능은 과연 어디에 조성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원(元) 세조 쿠빌라이칸의 능은 과연 어디에 조성했을까? - 최초공개 쿠빌라이칸은 칭기즈칸이 총애한 아내에게서 출생한 4명의 아들 중 막내인 톨루이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30대 중반이던 1251년부터 몽골 제국의 영토 확장과 기반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형인 몽케칸은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가 계획했던 송의 정복과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고, 페르시아 정벌은 쿠빌라이의 또 다른 형인 훌라구에게 맡겼고, 쿠빌라이에게는 중국정벌에 대한 군사·행정의 전권이 주어졌다. 쿠빌라이는 중국어를 읽거나 쓸 줄은 몰랐지만 중국 사상의 우수함을 일찍 깨닫고 자신의 주변에 믿을 만한 유교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의 통치술은 주위 한족 학자들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다. ..

카테고리 없음 2019.03.22

윤여동설 - 비운의 중혼후(重昏侯) 북송 흠종(欽宗)의 능은 지금의 어디에 조성되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비운의 중혼후(重昏侯) 북송 흠종(欽宗)의 능은 지금의 어디에 조성되었을까? - 최초공개       정강의 변(靖康之變) 때 금(金)나라에 잡혀와 오국성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죽어야 했던 비운의 황제 북송 휘종과 흠종.  혼덕공 휘종이 죽자 금나라가 그 유해를 남송으로 돌려보내 주었다지만, 그 아들인 중혼후 흠종은 죽을 때까지 고생고생하며 금나라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오국성(五國城)에서 죽었고, 그 부근에 묻혔다고 전해오는데, 아직까지 아무도 그 북송 흠종의 능을 정확히 찾아낸 사람은 없다.  그리하여 비록 아직은 추정단계지만 필자가 그 북송 흠종릉의 조성지를 찾아내 공개하는 것인데, 능의 보호를 위해 그 정확한 위치좌표는 공개하지 않는다.  [참고]  정강의 변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란 ..

카테고리 없음 2019.03.15

윤여동설 - 비운의 해빈왕(海濱王) 거란(요) 천조제(天祚帝)의 능은 지금의 어디에 조성되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비운의 해빈왕(海濱王) 거란(요) 천조제(天祚帝)의 능은 지금의 어디에 조성되었을까? - 최초공개       천조제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天祚帝)의 본명은 거란식으로는 야율아과(耶律阿果), 중국식으로는 야율연희(耶律延禧)이다.  전 황제 도종의 손자로 아버지 야율준(순종(順宗)으로 추존)은 일찍 주살되어 그가 뒤를 이었다. 천조제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이것을 불쌍하게 생각한 할아버지 도종에 의해서 여동생 진진국장공주(秦晉國長公主)와 함께 길러져 양왕으로 책봉 되었다. 일시적으로 조부 도종은 조카 야율순(耶律淳)을 황태자로 삼으려 하지만 신하들의 견제를 받아 천조제가 황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즉위한 천조제는 어리석은 성격이며 정무를 돌아보지 않고 가신의 간언..

카테고리 없음 2019.03.08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거란) 태조 야율아보기가 죽어 묻힌 조주(祖州)의 조릉(祖陵)을 찾아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거란) 태조 야율아보기가 죽어 묻힌 조주(祖州)의 조릉(祖陵)을 찾아라 - 최초공개 [요(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의 능을 조성한 후 능침의 수호를 위하여 설치했다는 조주천성군상절도(祖州天成軍上節度) 추정지, 규모 : 가로 약800m, 세로 약550m, 좌표 : 동경113도16분, 북위41도40분)] 요사(遼史) 지리지를 보면, “태조(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천제(天梯)、몽국(蒙國)、별로(別魯) 등 3산(三山)의 형세(形勢)를 취하여 위전(葦甸)으로 삼고, 금착전(金齪箭)을 쏘아서 표시하였는데, 이를 용미궁(龍眉宮)이라 하였다. 신책(神冊) 3년(918년)에 그곳에 성을 세우고 이름을 황도(皇都)라 하였다가 천현(天顯) 13년(938년)에 다시 이름을 상경(上京)이라 고치고 부(..

카테고리 없음 2019.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