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백하압록강설 18

윤여동설 – 수양제의 고구려 2차 침공로와 퇴각로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수양제의 고구려 2차 침공로와 퇴각로 – 최초공개  [수 양제 초상] (612년 6월) “옛날 명장들이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군사에 관한 일이 한사람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인데, 지금 우리는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양제는 중문(우중문)이 계교와 전략이 있다하여 모든 부대들로 하여금 (우중문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기 때문에 우중문이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우문술 등이 마지못하여 우중문(于仲文)의 말을 좇아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강(필자주 : 압록강이다)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 하였다. 을지문덕이 우문술(宇文述)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하려고 싸우고는 달아나고, 또 싸우고는 달..

카테고리 없음 2023.12.09

윤여동설 – 우리의 대륙고대사 진실(眞實)찾기의 지름길 영정하요수설(永定河遼水說)과 북경요동설(北京遼東說)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우리의 대륙고대사 진실(眞實)찾기의 지름길 영정하요수설(永定河遼水說)과 북경요동설(北京遼東說) - 최초주장 고대의 요동(遼東)은 낙양 동북3,600리에 위치한다고 하였고, 요수(遼水)를 건너면 바로 그 동쪽이 요동(遼東)이었다. ☆ 고대의 10리는 지금처럼 4km가 아니라 2.3km였다고 한다. 따라서 고대의 1,000리는 230km가 된다. 그런데 지금 낙양에서 북경까지의 고속도로 거리가 약800km쯤 된다. 환산해보면 약 3,500리쯤 된다. 지금의 북경 부근이 옛 요동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요동(遼東)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해 있었다고 수 많은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고, 서진(西晉) 말기에 고구려는 요동(遼東 : 요수 동쪽)을 차지했었고, 백제는 요서..

카테고리 없음 2021.05.08

윤여동설 – 주몽은 동부여(東扶餘)에서 도망쳐 어느 길을 따라 졸본(卒本)으로 왔으며, 처음 자리 잡은 비류수(沸流水) 중류는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주몽은 동부여(東扶餘)에서 도망쳐 어느 길을 따라 졸본(卒本)으로 왔으며, 처음 자리 잡은 비류수(沸流水) 중류는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동부여의)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주몽을 죽이려고 꾀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그 음모를 알고는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하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을 가지고 어디를 간들 어떠하겠느냐? 여기에서 머뭇거리다가 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멀리 가서 큰일을 도모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 더불어 벗을 삼아 엄호수[일명 개사수(盖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 압록(鴨綠) 동북쪽에 있다]까지 가서 물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

카테고리 없음 2020.11.21

윤여동설 - 한민족의 활 맥궁(貊弓)과 낙랑단궁(樂浪檀弓)의 원래 생산지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민족의 활 맥궁(貊弓)과 낙랑단궁(樂浪檀弓)의 원래 생산지 찾기 - 최초주장                                                                     [몽골인들의 활쏘기 : 화살이 활 몸통의 좌측에 위치하게 하고 쏜다]             후한서 고구려전 구려조를 보면,   “구려(句驪)는 일명 맥(貊)이라 한다. 별종으로서 소수(小水 : 소요수)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소수맥(小水貊)이라 한다. 좋은 활이 생산되는데, 소위 맥궁(貊弓)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고구려전에도,   “또 소수맥이 있는데, 구려가 대수(大水 : 대요수) 유역에 나라를 세우고 살았고, 서안평현의 북쪽에 소수(小水 : 소요수)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

카테고리 없음 2018.01.19

윤여동설 - 고구려 미천왕 을불설화 현장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미천왕 을불설화 현장찾기 - 최초공개      미천왕[주 : 고구려 15대왕]의 이름은 을불[혹은 우불이라고도 한다]이니 서천왕의 아들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다.   앞서 봉상왕이 아우인 돌고가 다른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죽이니 돌고의 아들 을불이 자기에게도 해가 미칠까 두려워 도망했었다. 처음에는 수실촌 사람 음모의 집으로 가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음모는 을불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심하게 일을 시켰다. 그 집 옆에 있는 늪에서 개구리가 울었는데, 음모는 을불을 시켜 밤새도록 기와조각을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하고, 낮이면 온 종일 땔나무를 하여 오라고 독촉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므로 고생을 견디다 못해 1년 만에 그 집을 떠나서 동촌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장사를 ..

카테고리 없음 2016.03.21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의 동부여 침공로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의 동부여 침공로 - 최초공개 [독석구에 있는 옛 장성인데, 중국에서는 명대에 쌓은 장성이라 한다. 그러나 필자는 옛날 고구려 때 북방 유목민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장성의 흔적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고구려 대무신왕과 동부여 대소왕의 악연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그를 보면, 유리왕 28년(A.D.9) 가을8월 동부여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어 왕을 책망하며 동부여를 상국으로 모실 것을 강요하자, 왕의 아들인 무휼(후일의 대무신왕)이 누란(累卵)을 이야기 하다. 유리왕 32년(A.D.13) 겨울11월 동부여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무휼(후일의 대무신왕)이 군사를 숨겨 놓았다가 동부여 군사들이 학반령에 이르자 급습하여 전멸시킨다. 대무신왕 3..

카테고리 없음 2015.03.22

윤여동설 - 을파소(乙巴素)의 초상을 찾았다고?

윤여동설 - 을파소(乙巴素)의 초상을 찾았다고?  [용문애에 새겨진 사신대사상(捨身大士像)으로서 고구려 국상 을파소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책성에 태조무열제의 기공비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비가 있다.안주 청천강변에 을지문덕의 석상이 있고, 오소리강(烏蘇里江) 밖에 연개소문의 송덕비가 있다.평양 모란봉 중간 기슭에 동천제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의 묘가 있으며, 운산 구봉산에 연개소문의 묘가 있다.(柵城有太祖武烈帝紀功碑 東鴨綠之皇城有廣開土境大勳蹟碑安州淸川江岸上有乙支文德石像烏蘇里江外有淵蓋蘇文頌德平壤牡丹峰中麓有東川帝朝天石 朔州巨門山西麓有乙巴素墓雲山之九峰山有淵蓋蘇文墓)”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 운주 용문애]       ..

카테고리 없음 2011.11.25

윤여동설 - 우리 고대사의 의문을 밝혀 줄 윤여동의 난하중심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우리 고대사의 의문을 밝혀 줄 윤여동의 난하중심설 - 최초주장 우리 고대사가 실제 이루어진 곳이 어디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모범답안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우리 고대 역사의 현장에 관한 한 아직 정설이 없고 가설만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가설이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개인의 의견이라 정의할 수 있으므로 우리 고대사가 이루어진 역사의 현장은 아직 정확히 찾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고대사의 현장이 과연 어디인가라는 질문에는 현격하게 다른 상반된 두 주장이 존재한다. 첫째는 한반도를 우리 역사의 중심지로 보고 해석하는 한반도중심설이 있고, 둘째는 발해 서북쪽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하는 그 부근 지역을 우리 고대사의 중심 강역으로 보는 난하중심설(윤여동설)이 있다. 한반..

카테고리 없음 2008.12.19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공개 원봉 2년(B.C.109) 한나라는 섭하를 보내어 (조선의) 우거를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수긍하지 않고,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올 때 국경인 패수(필자 주 : 이때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국경이 패수일 수는 없고 살수이어야 맞다. 만약 패수일 경우 패수 동쪽에 바로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사실이 이러했다면 위만조선은 도읍을 동쪽으로 멀리 옮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위만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왕검성에 도읍하고 있었다)에 이르자 사람을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장을 죽이고 즉시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는 그것을 잘한 것으로 여겨 나..

카테고리 없음 2008.12.05

윤여동설 - 위만조선은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조선은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 - 최초주장 우리는 싫든 좋든 위만조선의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위만조선의 역사가 우리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고, 특히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위만조선의과 한사군을 빼버리고는 우리 고대사 역사의 현장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위만조선이 과연 어디에 위치했던 나라였는지, 한사군이 어디에 설치되었었는지 지금까지도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니 매우 난감한 일이다. 역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역사의 현장이 어디였는지를 찾는 일인데, 고조선, 위만조선으로 이어진 그 역사의 현장이 어디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의 역사연구는 시작부터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카테고리 없음 2008.12.01

윤여동설 - 일본천황은 지금의 요동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도래인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일본천황은 지금의 요동반도에서 살다가 일본열도로 건너간 도래인이다 - 최초주장     지금 일본 사람들은 일본의 천황들이 원래부터 지금의 일본열도에서 수천 년 간 대를 이어 천황노릇을 했으며, 왜국의 건국시조라는 신무천황으로부터 평성천황까지 125대이고, 기원전 660년부터 2008년 현재까지 2,669년 간 이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유지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왕조라고 자랑한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의 왜국이 지금의 일본열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중국 요녕성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고, 서기 670년에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 뒤에도 수백년 간 요동반도에 그대로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대의 왜국은 섬나라가 아니었으나, 지금의 일본은 일본열도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

카테고리 없음 2008.07.20

윤여동설 - 고려의 강동 6주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의 강동 6주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서기 993년 고려 성종 12년에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으로서 고려를 침공한다.   앞서 왕건이 거란에서 보낸 낙타를 만부교에서 굶어 죽게 했고, 그 후 다시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 국교 맺기를 요청했으나 고려는 아예 상대를 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고려가 거란을 신의 없고 믿을 수 없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란이 침공해오자 고려에서는 박양유를 상군사로 삼고, 서희를 중군사로,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북서쪽 국경에 주둔하고 거란을 방어하게 하고, 왕 성종도 개경에서 서경으로 왔다가 안북부로 나아가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거란이 봉산군을 쳐서 고려의 선봉군사인 윤서안 등이 사로잡히게 된다.   성종이 서희..

카테고리 없음 2008.04.01

윤여동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난하 부근 대륙삼국의 역사서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난하 부근 대륙삼국의 역사서이다 - 최초주장 세상이 또 한번의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용틀임을 하고 있는 이때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다. 우리는 지금 조선시대 사람들처럼 한반도만이 우리 역사의 전부라고 인식하며 웅크리고 살 것인지, 우리 선조들이 내몽골 부근까지를 차지하고 주변 세력들과 끊임없이 다투고 경쟁하며 역사를 이어온 민족이었다고 자부하며 활개펴고 살 것인지 선택해야할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논하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제외하고는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삼국사기는 김부식을 비롯한 고려의 학자들이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에 편찬한 신라· 고구려· 백제 ..

카테고리 없음 2007.12.06

윤여동설 - 고려는 천리장성을 한반도에 쌓지 않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는 천리장성을 한반도에 쌓지 않았다? - 최초주장       고려는 9대 덕종 2년인 서기 1033년 8월에 이르러 거란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평장사 유소에게 명하여 천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서해 바닷가의 옛 국내성과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의 중간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덕(寧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淸塞), 평로(平虜), 영원(盈遠), 정융(定戎), 맹주(孟州), 삭주(朔州) 등 13주를 거치고 요덕(耀德), 정변(靜邊), 화주(和州) 등 3성에 대어 동쪽으로 바다에 닿으니 길이가 1천여 리에 뻗치고, 돌로 성을 쌓았으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성벽의 높이가 7-8m이고, 성벽의 두..

카테고리 없음 2007.11.23

윤여동설 - 백제의 한수(漢水)는 지금의 한반도 한강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한수(漢水)는 지금의 한반도 한강일까? - 최초주장 백제의 온조왕은 나라를 세우고 13년째인 기원전 6년에 이르러,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편안한 날이 적다. 내가 어제 나가서 순행하다가 한수(漢水)의 남쪽 토양이 비옥한 것을 보았으니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구히 편안할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하고는 다음해 정월 위례성에서 한수 남쪽(하류)으로 도읍을 옮기고 남한성(南漢城)이라고 하게된다. 이렇게 한수(漢水)는 우리의 삼국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는 비류와 온조가 패수와 대수를 건너 한산 부아악에 올랐다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와 고구려 건국설화를 읽고, 졸본을 지금의 환인, 패수를..

카테고리 없음 2007.11.15

윤여동설 - 고대의 요수(遼水)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대의 요수(遼水)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 최초주장 [지금의 북경(베이징) 일원이 고대의 요동이었고, 영정하가 고대의 요수였다]    요수(遼水)는 우리 고대 역사 강역의 서쪽 경계를 밝혀줄 중요한 강의 이름 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치를 놓고 논란이 많은 곳 중의 하나이다.     지금의 요하가 옛 요수라는 주장으로부터, 그 서쪽의 대릉하를 요수라고 하기도 하고, 대릉하 서쪽의 난하를 요수라고 하기도 하며, 난하 서쪽의 조백하를 요수라고 하기도 하고, 북경 서쪽의 영정하를 요수라고 하기도 하며, 심지어 어느 사람은 황하를 요수라고 하기도 한다.    이렇듯 주장들이 각각이라는 것은 아직 옛 기록 속의 고대 요수를 정확히 찾지 못했다는 말로써, 그 강의 위치를 제대로 찾으면 우리 고대 역사..

카테고리 없음 2007.11.07

윤여동설 - 위화도회군과 조선의 개국 그리고 한양천도에 숨겨진 비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화도회군과 조선의 개국 그리고 한양천도에 숨겨진 비밀 - 최초주장 이성계는 1361년 10월에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고, 홍건적의 침입 때는 사병 2천을 이끌고 개경에 맨 먼저 입성했다. 또한 고려가 1258년 원나라에게 빼앗겼다가 1356년에 탈환한 쌍성총관부를 1362년 2월에 이르러 원나라가 재탈환하기 위하여 여진장수 나하추로 하여금 수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려를 침입하자 공민왕은 동북면 도지휘사로 하여금 그를 막게 했으나 계속 패배하자, 7월에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를 막게 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침공군을 전멸시켰고 나하추는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친 후 원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명나라에 투항해야만 했다. 이후 이성계는 왜..

카테고리 없음 2007.10.27

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을 찾았다 - 최초주장

하가점 선사유적지                                                                      내몽골 적봉 홍산 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을 찾았다                                                                                                     한 민족 마음의 고향이며, 우리 역사의 중심지인 왕검성(王儉城, 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은 과연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이 왕검성을 확실하게 찾지 못한 채 조선 시대에 이르러 역사를 착각한 일부 사람들이 한반도 북한 평양을 왕검성이라 비정해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왜곡되고 축소된 역사가 사실인 것처럼 전해진 안..

카테고리 없음 2007.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