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패수 21

윤여동설 - 위만의 옛 도읍 험독(險瀆)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의 옛 도읍 험독(險瀆)의 위치 - 최초주장 사기 조선열전과 전한서 조선전을 보면,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椎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석해 보면, “연왕 노관이 (한나라에) 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위만)도 망명하였는데, 무리 천여명을 모아 추결을 하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넘고 패수를 건너 (조선왕 준에게 망명하고 돌아와 준이 배치해 준), 진고공지상하장에서 살았다” 라는 뜻이다. ☆ 위략에 “(조선왕)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왕위에 올랐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진항(진승과 항우)이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점점 준에게 망명해오자 준..

카테고리 없음 2013.03.24

윤여동설 - 험독(險瀆)은 지금의 북경남쪽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처음 살았던 험독(險瀆)은 지금의 북경남쪽 부근 - 최초주장     위략에  “(조선왕)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왕위에 올랐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진항(진승과 항우)이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점점 준에게 망명해오자 준은 이들을 (고조선의) 서부지역에 살게 하였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나라는 요수(원문은 패수로 되어 있으나 요수의 오기임이 확실하므로 필자가 고쳤다)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관(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치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조선의) 준(준왕)에게 망명하고는 서쪽 변방에 살게 ..

카테고리 없음 2012.01.06

윤여동설 - 소서노와 비류 온조의 남하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소서노와 비류 온조의 남하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유리를 말함)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드디어 오간, 마려 등 열명의 신하들을 데리고 남쪽지방으로 떠나니 백성들 중에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이리하여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서 살만한 곳을 살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기이 제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조에는, “고전기(古典記)에 이르기를, ”동명왕의 세째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유년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년에 도읍을 한산(漢山:지금의 광..

카테고리 없음 2011.06.24

윤여동설 -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

윤여동설 -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 근구수왕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몇째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 375년 11월에 13대 근초고왕(이름은 부여구였다)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백제 14대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10년인 384년 4월에 죽었는데, 그의 성명은 부여수(扶餘須)였다. 왕비는 아이부인(阿爾夫人)으로서 15대 침류왕을 낳았다. 어느 사람은 삼국사기 근구수왕 조의 “一云諱須(일운휘수)”라는 기록을 보고는 근구수왕의 이름이 “휘수(諱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기록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서 이 의미는 “일설에 이르기를 근구수왕의 이름은 수(須)라고 한다” 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근구수왕의 성씨는 백제왕실의 성씨인 “부여(扶餘)”씨였을 것이고, 이름은 “수(須)”로서 "부여수(扶餘須)"가 근구..

카테고리 없음 2011.03.11

윤여동설 - 고구려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 조를 보면,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27년(A.D.44) 조를 보면,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여 그 땅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드니 살수(薩水)이남 지역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 대무신왕이 최리의 낙랑국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낙랑국 땅을 차지하자 7년 뒤에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옛 낙랑국 땅의 일부인 살수이남 땅을 고구려로부터 다시 탈환하여 낙랑군을 부활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

카테고리 없음 2011.03.06

윤여동설 - 험독과 왕험(왕검성)은 같은 곳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험독(險瀆)과 왕험(王險:왕검성)은 같은 곳이 아니다 - 최초주장 사기 조선전을 보면, “조선왕 만(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전연 때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빼앗아 관리를 보내 장새를 쌓고 다스렸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번조선 지역을) 요동외요에 속하게 했는데, 한나라가 흥기하자 그 땅이 멀고 지키기가 어렵다 하여 다시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 연왕 노관이 (한나라에) 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위만)도 무리 수천인을 모아 추결과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망쳐 요새를 넘고 패수를 건너 (고조선에 망명한 후) 진나라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서 살았다. 점점 진번조선의 만이들과 옛 연나라,제나라 망명자들을 받아들여 왕이 되고 왕..

카테고리 없음 2010.04.04

윤여동설 -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 만번한은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조선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국경이었던 만번한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 - 최초주장     삼국지 한(韓) 전을 보면 위략(魏略)의 기록을 주로 달아 놓았는데, 그 기록을 보면,『위략에 이르기를,  옛날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가 있었다. (昔箕子之後 朝鮮侯)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동쪽을 공략하려 하였는데,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주 왕실을 존속시켜주기 위하여 거꾸로 연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다가 그 대부인 예가 간하여 중지하고, 예로 하여금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조선후의)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져 연나라가 드디어 장수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필자주 : 사기 흉노전에는 1천여..

카테고리 없음 2009.08.06

윤여동설 -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 - 최초공개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과연 지금의 어디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주장이 있어왔다. 지금의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조선시대부터의 주장으로부터 압록강 북쪽 요양 또는 요하서쪽 조양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필자의 주장 등이 있는데, 이처럼 주장들이 많다는 것은 아직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정확히 찾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 만약 고구려의 평양성을 정확히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 고대역사의 거의 전부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고조선의 왕검성이었기 때문에 고조선의 중심지를 알 수 있게 되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며, 삼한, 삼국..

카테고리 없음 2009.05.25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공개 원봉 2년(B.C.109) 한나라는 섭하를 보내어 (조선의) 우거를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수긍하지 않고,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올 때 국경인 패수(필자 주 : 이때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국경이 패수일 수는 없고 살수이어야 맞다. 만약 패수일 경우 패수 동쪽에 바로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사실이 이러했다면 위만조선은 도읍을 동쪽으로 멀리 옮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위만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왕검성에 도읍하고 있었다)에 이르자 사람을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장을 죽이고 즉시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는 그것을 잘한 것으로 여겨 나..

카테고리 없음 2008.12.05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과 미추홀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과 미추홀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기원전 42년 기묘년에 소서노는 어린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졸본의 압록강 나루에서 배에 몸을 실었다. 이때 소서노의 나이 25세였고, 비류는 4-5세정도, 온조는 2-3세 정도였다.[필자주 : 혹은 비류와 온조가 쌍둥이 형제였을 가능성도 있다] 원래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호족 연타발의 딸로서 졸본부여 왕족인 우태에게 시집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둘째 아들 온조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인 우태가 갑자기 죽어 젊은 나이에 아들 둘 딸린 과부가 되어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졸본에서 주몽왕과 재혼한 후 자신이 우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졸본부여의 태자로 봉하려 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졸본을 떠나 압록강을 타고 내..

카테고리 없음 2008.09.19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을까? - 최초공개   [위 : 산의 굴곡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축성된 승덕시 피서산장 성벽]  『조선왕 만(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연(燕)나라가 강성할 때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귀속시키고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었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 시켰을 때 조선은 요동(遼東)의 외곽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흥기하자 그곳이 멀고 수비하기가 어렵다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정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위만)도 1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상투(추결)를 틀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달아나 패수를 건너 망명하여 진나라의 빈땅인 상하..

카테고리 없음 2008.06.17

윤여동설 - 고구려가 백제(大陸百濟)를 백잔(百殘)이라 부른 이유는?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는 왜 백제(大陸百濟)를 백잔(百殘)이라 불렀을까? - 최초주장 광개토대왕 비문 영락 6년 병신년 조를 보면,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倦)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OO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이라고 새겨져 있다. ☆ 위 기사 중 괄호 속의 글자는 원래 倦(게으를 권)자였으나 지금까지 이 글자가 글자 모양이 비슷한 倭(왜)자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신묘년 기사의 해석을 놓고 한·일 간에 논란이 많았는데, 사실 이 조문은 왜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압록강 너머 집안에 있는 호태왕 비는 413년 10월에 광개토대왕이 죽자 아들인 장수왕이 그 다음해인 414년 갑인년 9월 29일에 아버지인 광개토대왕 평생의 훈적을 새겨 능 앞에 세운 훈적비로서 당시 고구..

카테고리 없음 2008.02.20

윤여동설 - 살수(薩水)는 한반도 청천강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살수(薩水)는 한반도 청천강이 아니다 - 최초주장 [강물이 구불구불 흐르는 모양이 마치 스님들의 머리모양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 살수(薩水 보살살 물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을지문덕이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하려고, 싸우고는 도망하고 또 싸우고는 도망하곤 하여, 우문술이 하루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겼다. 그들은 계속 이기자 자신감이 생겼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못 이겨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는 체 하고 우문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대를 돌려세운다면 왕을 모시고 황제가 있는 곳으로 가서 예방하겠다' 하였더니 우문술이 자기 군사들이 피..

카테고리 없음 2007.11.12

윤여동설 - 패수(浿水)는 한반도 대동강이 아니라 발해 북쪽 난하(灤河)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패수(浿水)는 한반도 대동강이 아니라 발해 북쪽 난하(灤河)이다 - 최초주장    패수(浿水)는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 강이다.  패수를 제대로 찾아야만 우리는 수수께끼 같이 전해진 우리 옛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북한의 대동강이 옛 기록 속의 패수라고 하고,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하고 있는데, 우리 역사를 조금만 깊이 연구해보면 우리 역사에서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 역사의 중심점이 대륙인 것을 모르고, 모든 역사 기록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 해석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는데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그것을 인식하지..

카테고리 없음 2007.11.08

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고구려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고구려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청나라 때의 여름궁전인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피서산장)의 정문인 여정문]    지금 압록강 너머 집안(輯安:集安)에는 호태왕비가 서 있고, 왕릉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고분들과 그 집안 부근에는 돌을 쌓아 만든 적석분들이 즐비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그곳을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國內城)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국내성이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대 유리왕 22년(A.D.3) 조에,  "겨울 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라는 기록과   16대 고국원왕 12년(A.D.342) 조의 "봄 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라는 기록에 따라 지금의 집안을 국내성이라 추정한 것 ..

카테고리 없음 2007.10.09

윤여동설 -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최대 어디까지 정복했을까?

윤여동설 -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최대 어디까지 정복했을까?                                                                                        압록강 북쪽인 길림성 집안(輯安)에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호태왕비 또는 광개토왕비라고도 부른다)가 발견되어 광개토태왕이 평생에 과연 어디까지 정복했는가 하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의 영향력이 과연 어디까지 뻗쳤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면 지금 조그마한 한반도에 갇혀 왜소해진 우리 국민들의 대륙기질을 잠 깨울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최대의 강역을 이룬 광개토태왕이 당시 어디까지 정복했을까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가능성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한민족의 ..

카테고리 없음 2007.10.07

윤여동설 - 방 4천리 강역의 삼한은 한반도 남한에 위치할 수 없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방 4천리 강역의 삼한(三韓)은 한반도 남한에 위치할 수 없다 - 최초주장     사서들의 기록을 보면 한(韓: 삼한)이 방4천리에 이르는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1천리에 지나지 않는 한반도 남한에 삼한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역사를 해석한다.   삼국지 한전의 주를 보면,   『위략에 이르기를,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 한 뒤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을 때 조선왕 부(否)가 왕위에 올랐는데, 진나라가 공격할까 두려워하여 복속하는 체 했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했다.  그 뒤 20여 년이 흘러 진항(진승과 항우)이 병기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나라·제나라·조나라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

카테고리 없음 2007.10.06

윤여동설 -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에 설치되지 않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에 설치되지 않았다 - 최초주장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발해의 산해관 노룡두이다. 앞에 관광객을 싣고 노룡두와 해신묘 앞바다를 한바퀴 돌며 구경 시켜주는 모터보트가 한가롭게 놓여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 것으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그리하여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순체와 양복이란 두 장군을 보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설치한 한사군이 지금의 북한 지역을 나누어 설치되었다고 역사를 이해한다. 즉 육군인 순체는 지금의 요하 쯤에서 출발하여 압록강, 청천강을 건너고, 대동강을 건너 왕검성으로 향했고, 수군인 양복은 산동반도를 출발해 동쪽으로 서해(황해)를 건너 대동강..

카테고리 없음 2007.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