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대륙백제 64

윤여동설 -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는 발해 북쪽,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난주(난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는 발해 북쪽,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난주(난현) - 최초주장     백제26대 성왕은 서기 538년 봄에 이르러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는 국호까지도 남부여(南扶餘)로 바꾼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는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537년까지로 끝나고, 538년부터는 남부여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인데, "남부여"라는 국호는 "옛 졸본부여의 영광을 남쪽 땅에 재현하겠다"는 명분을 세워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길 때만 잠깐 언급했을 뿐 실제 국호로 사용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백제의 성왕은 왜 이때에 이르러 사비로 도읍을 옮겨야 했던 것일까?   학자들은 그 이유를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 때문에 도읍인 웅진이 위험하다고 보고 더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을 것이라고 추정..

카테고리 없음 2008.10.12

윤여동설 - 백제 문주왕이 옮긴 도읍 웅진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노룡현을 말하는 것이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의 문주왕이 옮긴 도읍 웅진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노룡현을 말하는 것이다 - 최초공개 [백제 웅진성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노룡 영평부성도] [서문] [남문] [진황도 노룡현 영평부성터 내의 시가지(중앙)와 서쪽을 지나는 청룡하] 고구려의 장수왕은 475년(백제 21대 개로왕 21년)에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도읍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도망치는 개로왕을 잡아죽이게 된다. 그리하여 개로왕의 동복동생인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급히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우리는 이 백제의 도읍 웅진을 충남 공주라고 알고 있다. ☆ 삼국사기에는 문주왕을 개로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개로왕의 동복동생이다. 개로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문주왕이 왕위를 이었다. 우..

카테고리 없음 2008.10.06

윤여동설 - 백제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 최초공개 시조 온조왕(溫祚王) : 백제왕들의 성은 모두 부여(扶餘) 씨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 "그의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졸본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 씨로 성씨를 삼았다"고 했으므로 백제 왕실의 성씨는 "부여" 씨가 틀림없을 것인데, 중국 사서들은 대개 백제왕들을 "여(餘)" 씨로 기록하고 있고, 주서는 "부여(夫餘)" 씨로, 신·구당서는 "부여(扶餘)" 씨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삼국 중에서 한 개 성씨로 왕조를 이은 나라는 "백제" 뿐인데, 백제시조 온조왕의 "온조"는 이름일까? 아니면 시호일까? 필자는 이름이 아니라 시호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시호를 사용했고, 동시대인 고..

카테고리 없음 2008.08.27

윤여동설 - 백제 역사의 미스테리가 풀렸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역사의 미스테리가 풀렸다 - 최초주장       지금까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백제는 매우 미스테리한 나라였다.   왜냐하면 백제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같은 기록들에 부딪치기 때문이었다.  ☆ 옛 사서의 백제 관련 기록들을 모두 한반도에 비정하여 해석하려했기 때문에 미스테리하게 느껴졌을 것인데, 사실 백제는 한반도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동쪽에 (신라가 있고,서쪽에)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 말갈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했다고도 기록되어 있고, 신라의 남쪽에는 가야가 있다고도 했고, 마한의 동북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사서들은 백제가 요동 동쪽 1천여 ..

카테고리 없음 2008.08.11

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 최초주장 우리나라 사람 중에 일연의 삼국유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삼국유사가 쓰여진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저자인 일연이 죽은 때가 84세 때인 1289년이었으므로 그 이전 언젠가 삼국유사를 집필했을 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삼국이전의 우리 상고사에 대하여 다루지 않고, 오직 삼국시대 만을 다룬데 비해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조선, 왕검조선을 시작으로, 부여, 삼한, 한사군, 삼국과 가야, 후백제와 발해까지를 언급하고 있고, 불교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 훨씬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카테고리 없음 2008.06.05

윤여동설 - 새로 그려보는 백제 초기의 왕위 계승도

윤여동설 - 새로 그려보는 백제초기의 왕위 계승도 시조 온조왕 ↓자 ?(실명) : 아버지인 온조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2대 다루왕 ↓자 ?(실명) : 아버지인 다루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3대 기루왕 ↓자 ?(실명) : 아버지인 기루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4대 개루왕 ↓자 5대 초고왕 ↓자 6대 구수왕 ↓자 ?(실명) : 아버지인 구수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7대 사반왕 : 약 10세쯤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8대 고이왕에게 왕위를 찬탈 당했다. ☆ 백제 초기의 왕위 계승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되었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그 진실을 찾아야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데, 비록 필자의 추정이 진실까지는 못된다 하더라도 그 진실에 한발자국 다가갈 수는 있을 것이다. ..

카테고리 없음 2008.05.29

윤여동설 - 신라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라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 최초공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한 신라 왕릉의 조성위치  시조 혁거세거서간의 능은 담암사 북쪽(曇巖寺北) 사릉(蛇陵)(박씨)  ☆ 삼국유사에는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는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갔다. 7일 뒤에 유체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는데 왕후 역시 죽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해서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하므로 오체로서 오릉을 만들고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담엄사(曇嚴寺) 북릉이 이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2대 남해차차웅의 능은 사릉원내(蛇陵園內)(박씨) 3대 유리이사금의 능은 사릉원내(蛇陵園內)(박씨) 4대 탈해이사금의 능..

카테고리 없음 2008.05.22

윤여동설 - 일본 국보 스타하치망인물화상경 명문의 비밀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일본 국보 스타하치망 인물화상경 명문의 비밀 - 최초공개                                                          지금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우전팔번(스타하치망)신사 인물화상경(隅田八幡神祠 人物畵像鏡)에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명문이 새겨져 있어 한·일간에 그 명문의 해석을 놓고 주장들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그 명문에 "사마"와 "남제왕"이라는 두 사람의 왕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남제왕의 신분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고, 사마란 백제 무령왕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칠지도 명문과 함께 이 명문 역시 아직까지 명쾌하게 해독되지 못하고 있는데,   기록을 보면,"癸未年八月 日十六王年男弟王在意紫沙加宮時斯麻念長壽遣開中費直 穢人今..

카테고리 없음 2008.05.16

윤여동설 - 백제 시조 온조왕의 일생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시조 온조왕의 일생 - 최초주장 백제시조 온조왕의 성은 부여씨이고, 기원전 46-45년경 졸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여우태이고, 어머니는 연소서노이다. ☆ 우태는 동명왕의 작은 아들의 아들 즉 손자로 보이고,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는 기원전 66년에 출생했는데, 18세인 기원전 49년에 혼인하여 첫아들을 낳았다면 장자인 비류는 기원전 49-48년 생이 되고, 2-3년 뒤에 다시 둘째 아들을 낳았다면 온조는 기원전 46-45년 생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혹시 이들 형제가 쌍둥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만약 쌍둥이라면 둘 다 기원전 49-48년생일 수도 있다.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의 이름은 부여두막으로서 기원전 108년에 졸본부여를 세우고 왕위에 올라 기원전 86년에 북부여를 멸망..

카테고리 없음 2008.03.20

윤여동설 - 고구려가 백제(大陸百濟)를 백잔(百殘)이라 부른 이유는?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는 왜 백제(大陸百濟)를 백잔(百殘)이라 불렀을까? - 최초주장 광개토대왕 비문 영락 6년 병신년 조를 보면,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倦)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OO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이라고 새겨져 있다. ☆ 위 기사 중 괄호 속의 글자는 원래 倦(게으를 권)자였으나 지금까지 이 글자가 글자 모양이 비슷한 倭(왜)자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신묘년 기사의 해석을 놓고 한·일 간에 논란이 많았는데, 사실 이 조문은 왜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압록강 너머 집안에 있는 호태왕 비는 413년 10월에 광개토대왕이 죽자 아들인 장수왕이 그 다음해인 414년 갑인년 9월 29일에 아버지인 광개토대왕 평생의 훈적을 새겨 능 앞에 세운 훈적비로서 당시 고구..

카테고리 없음 2008.02.20

윤여동설 - 근초고왕을 알면 백제(대륙백제)가 보인다(1)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근초고왕을 알면 백제(대륙백제)가 보인다 (1) - 최초주장    백제 13대 근초고왕은 비밀의 왕국 백제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매우 중요한 왕이다.  지금 우리는 그가 백제 역사상 가장 넓은 강역을 이루었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으며, 백제 최초의 역사서도 만들었고, 이때부터 백제가 비로소 중국과 교류하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백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아직까지도 근초고왕에 대하여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고, 그와 관련된 거의 모두가 논란 중에 있다.   즉 근초고왕의 이름이 무엇이고, 왕비는 누구이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그의 업적이 왜 20년 간이나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았고, 앞 왕이었던 계왕과는 무슨 관계이며, 중국으로부터 받은 ..

카테고리 없음 2008.01.29

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이 말해주는 백제(대륙백제)의 중심강역은 과연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이 말해주는 백제(대륙백제)의 중심강역은 과연 어디인가? - 최초주장 송서 백제국전(宋書 百濟國傳) 백제국(百濟國)은 본래 고(구)려(高驪)와 함께 요동(遼東)의 동쪽 1천여 리에 있다. 후에 고(구)려는 요동(遼東)을,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한다. 의희 12년(A.D.416) 백제왕 여영(餘映:전지왕)을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봉했다. 고조가 즉위한 뒤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작위를 올려 봉하였다. 소제 경평 2년(A.D.424) 여영이 장사 장위를 파견하여 대궐에 조공을 바쳤다. 원가 2년(A.D.425) 태조가 조서를 내려, "황제가 말하노라,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카테고리 없음 2008.01.15

윤여동설 - 한반도 제주도는 삼국사기 기록 속 탐라국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제주도는 삼국사기 기록 속 탐라국이 아니다 - 최초주장 [한반도 제주 애월읍의 해중고인돌]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0년(A.D.498) 조를 보면, "8월 왕이 탐라(耽羅)에서 조공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그를 치려고 몸소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했다[탐라는 탐모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지금 이 사건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해 이때의 백제가 지금의 충청, 전라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고, 탐라는 곧 제주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당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웅진성 즉 지금의 충남 공주를 출발한 동성왕이 탐라국인 제주도를 침공하기 위해 무진주인 광주쯤에 도착했을 때 탐라에서 사신을 보내 사죄했기 때문에 정벌..

카테고리 없음 2007.12.31

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의 저작물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의 저작물이 아니다 - 최초주장 삼국유사는 왕명에 의해 만들어진 삼국사기와는 달리 한 승려가 전국에 흩어져 전해지고 있던 비전의 이야기들을 모아 만든 책이라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는 우리 상고사로부터 후백제까지의 역사를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불교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어 우리 고대역사와 불교의 역사를 동시에 알 수 있게 하는데, 그 내용이 정사인 삼국사기와는 달리 역사의 전면보다는 잘 보이지 않는 역사 뒷면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어 우리 역사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 책을 만든 목적이 일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찰의 승려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또 일연 개인이 아닌 종단차원에서 삼국유사를 만들었..

카테고리 없음 2007.12.07

윤여동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난하 부근 대륙삼국의 역사서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난하 부근 대륙삼국의 역사서이다 - 최초주장 세상이 또 한번의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용틀임을 하고 있는 이때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다. 우리는 지금 조선시대 사람들처럼 한반도만이 우리 역사의 전부라고 인식하며 웅크리고 살 것인지, 우리 선조들이 내몽골 부근까지를 차지하고 주변 세력들과 끊임없이 다투고 경쟁하며 역사를 이어온 민족이었다고 자부하며 활개펴고 살 것인지 선택해야할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논하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제외하고는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삼국사기는 김부식을 비롯한 고려의 학자들이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에 편찬한 신라· 고구려· 백제 ..

카테고리 없음 2007.12.06

윤여동설 - 백제의 백강(白江)은 지금의 한반도 금강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백강(白江)은 지금의 한반도 금강이 아니다 - 최초주장 당나라의 소정방이 타고 올라와 백제를 멸망시킨 백강(白江)은 지금의 난하하류 우리는 지금 서기 660년에 당나라의 소정방이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서해바다를 건너 지금의 금강을 타고 올라가 충남 부여의 사비성을 공격해 백제를 멸망 시켰다고 역사를 해석한다. 그리하여 소정방과 김법민이 만난 덕물도를 지금의 덕적도일 것이라 하고, 당나라군이 타고 올라온 백강구를 금강 하류일 것이라 하며,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합류한 기벌포를 충남 서천, 군산, 강경 쯤일 것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백제 멸망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탄현이 어디를 말하는지, 황산이 어디를 말하는지, 기벌포가 어디를 ..

카테고리 없음 2007.11.18

윤여동설 - 백제의 한수(漢水)는 지금의 한반도 한강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한수(漢水)는 지금의 한반도 한강일까? - 최초주장 백제의 온조왕은 나라를 세우고 13년째인 기원전 6년에 이르러,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편안한 날이 적다. 내가 어제 나가서 순행하다가 한수(漢水)의 남쪽 토양이 비옥한 것을 보았으니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구히 편안할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하고는 다음해 정월 위례성에서 한수 남쪽(하류)으로 도읍을 옮기고 남한성(南漢城)이라고 하게된다. 이렇게 한수(漢水)는 우리의 삼국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는 비류와 온조가 패수와 대수를 건너 한산 부아악에 올랐다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와 고구려 건국설화를 읽고, 졸본을 지금의 환인, 패수를..

카테고리 없음 2007.11.15

윤여동설 - 한반도 최초의 절은 백제 무광왕이 세운 제석정사일 가능성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최초의 절은 백제 무광왕이 세운 제석정사일 가능성 - 최초주장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는 제석사지에 깨어진 탑의 심초석만 남아 있다] [반도백제 무광왕릉과 왕비릉으로 추정되는 익산 쌍릉] 삼국사기 기록 상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에서 불교가 맨 처음 전래된 나라는 고구려로서 17대 소수림왕 2년인 372년으로 기록되고 있다. 기록을 보면, "2년(A.D.372) 여름 6월 진(前秦)나라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로서 답례했다" "4년(A.D.374) 중 아도가 왔다" "5년(A.D.375) 봄 2월 처음으로 초문사를 창건하여 순도가 있게 하고,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아도가 있게 하니 이것이 해동불법의 시초이다" 라고..

카테고리 없음 2007.11.01

윤여동설 - 백제 멸망 후 그 땅을 나누어 당나라가 설치한 5도독부의 추정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어떻게 나누어 5도독부를 설치했었을까? - 최초공개    서기 660년 7월 18일 백제의 의자왕은 늙은 몸을 이끌고 태자와 대신·장군들을 이끌고 사비성에서 소정방에게 항복함으로써 678년 백제 왕조는 사직을 문닫게 되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들, 신하와 장군 등 93명과 백성 1만2천여 명이 당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조에는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장군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장안으로 호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백 개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지역을 나누어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의 5도독부로 나누어 통치하..

카테고리 없음 2007.10.17

윤여동설 - 동성왕은 웅진 대궐 동쪽 어디에 임류각을 세웠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동성왕은 웅진 대궐 동쪽 어디에 임류각을 세웠을까? - 최초공개 [위 : 한반도 충남 공주 공산성 내에 복원해 놓은 임류각 ㅋㅋ] [위: 웅진 공산(公山) 추정지(진황도 노룡현)] [위 : 웅진성 동쪽 임류각 추정지]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2년(A.D.500) 조에는, "봄에 대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나 되고 또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 잘못을 간하는 신하들이 상소문을 올렸으나 답하지 않고 다시 잘못을 간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문을 닫아버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학자들은 동성왕 때 백제의 도읍이 웅진이었으므로 그 웅진이 지금의 충남 공주였고, 백제의 왕궁이 그곳의 공산성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공산성 동쪽에서 임류각을 찾으려 노력했다...

카테고리 없음 2007.10.15